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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대출받은 노인 10명 중 6명 “전월세 자금 모자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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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전북 전주에 사는 김모(여·63)씨는 지난 5월 급하게 목돈이 필요했다. 치과에서 11개의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해서다. 견적이 2000만원가량 나왔다. 만 65세가 안 돼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김씨는 자금 마련을 고민하다 연금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실버론을 알게 됐다. 덕분에 500만원을 급히 대출했다. 김씨는 “매달 38만원가량 받는 연금에서 현재 이자로 5000원 정도 빠지긴 하지만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실버론 8년간 7만명 이용 #보증금 급전 마련에 은퇴자 몰려 #연금 수령액 깎는 방식으로 상환 #장기적으론 노후 빈곤 심화 우려

국민연금을 담보로 대출받는 고령층이 늘고 있다. 최대 1000만원까지 목돈을 빌려주는 국민연금 실버론을 이용한 노인이 올해 6000명을 넘은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전·월세 시장 불안 때문에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노후 밑천을 미리 당겨쓰는 사례도 많다.

국민연금공단은 3일 2012년 5월 국민연금 실버론을 시행한 이후 지난 9월까지 모두 6만8088명이 3279억원을 빌렸다고 밝혔다. 올해 1~9월 누적 인원은 6092명, 지급 금액은 379억원이다. 실버론은 만 60세 이상 국민연금 수급자가 목돈이 필요할 때 낮은 금리로 이용할 수 있는 대출 상품이다.

연간 연금 수령액의 두 배 이내(최고 한도 1000만원)에서 빌릴 수 있다. 전·월세 보증금은 임차개시일 전후 3개월 또는 갱신계약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신청할 수 있다. 의료비는 진료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신청하면 된다. 신용등급이나 소득·재산과 상관없이 대부가 가능하며, 용도 별로 신청기한이 정해져 있다.

연금공단에 따르면 2012년부터 올해 9월까지 누적 이용자 10명 중 6명(60.2%)꼴인 4만985명은 전·월세 자금 마련에 썼다. 매년 이런 경향은 비슷하다. 올해 61.2%(3729명), 지난해 59.7%(5910명)가 전·월세금 마련 목적으로 실버론을 이용했다. 보증금이 필요한데 소득이 없어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은퇴자가 몰리는 것으로 보인다. 집세를 제외하고 실버론의 38%가량은 의료비 용도다.

연금공단 관계자는 “전·월세 자금이나 의료비 등 긴급자금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며 “평균 임차보증금이 오르고 물가가 상승한 현실을 반영해 대출 한도를 올려왔다”고 말했다. 실버론은 매년 배정된 예산을 모두 소진한다. 고령층의 급전 수요가 몰려 지난해에는 1년 치 예산이 반년 만에 고갈돼 추가 증액했다. 이렇게 연중에 예산이 소진돼 증액한 것은 2015년과 2019년 두 차례다.

최대 5년간 원금균등분할상환 조건으로 할 수 있는데 1~2년 거치를 희망하면 최대 7년까지 상환 기간을 늘릴 수 있다. 상환이라고 하지만 이용자의 대부분인 99.5%는 연금을 깎는 방식(연금공제)으로 갚는다. 2019년 기준 1인당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52만원 정도인데 실버론을 받은 사람들 대다수는 원금과 이자로 깎이는 액수가 월평균 8만~9만원 정도라고 한다. 국민연금만으로도 노후 대비가 충분치 않지만 수령액을 깎으면서까지 급전이 필요한 노인이 많다는 얘기다.

장기적으로는 노인 빈곤 완화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단 우려도 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연금은 소득이 없을 때 임금을 보장하려는 것인데 이를 미리 당겨 쓰게 되면 노후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노후 생활 보장이라는 국민연금의 근본 취지를 보면 이에 반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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