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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캔버스는 빈티지 디올 재킷" 화가 차경채의 특별한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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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차경채씨가 29일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차경채씨는 1980~90년대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의 등 부분을 오리고 벨크로를 이용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말하자면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은 입을 수 있는 옷이자 움직이는 그림액자가 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술가 차경채씨가 29일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차경채씨는 1980~90년대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의 등 부분을 오리고 벨크로를 이용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말하자면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은 입을 수 있는 옷이자 움직이는 그림액자가 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빈티지 디올을 캔버스로 사용하는 화가” 지난달 15일 유명 패션 잡지 ‘보그’ 미국판 온라인 기사의 제목이다. 영문 이름 에스텔(Estelle), 한국 이름 차경채(28)씨의 인터뷰 기사다.
미국 보스톤의 예술대학 SMFA와 터프츠 대학에서 각각 순수미술과 철학을 공부한 차씨는 현재 ‘eee’라는 레이블을 운영하며 아주 특별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1980~90년대 생산된 프랑스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과 리바이스 재킷의 등 부분을 네모나게 오려 모서리마다 벨크로(‘찍찍이’라 불리는 접착 도구)를 꿰맨 다음 직접 그린 그림들을 붙인다. 말하자면 빈티지 디올·리바이스 재킷은 차씨가 그린 그림의 움직이는 액자가 되는 셈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순수예술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패션을 접목시킨 거예요.”
차씨는 유명 패션학교인 파슨스 파리 분교와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단기과정으로 패션 디자인도 공부했다.
“순수미술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아주 좋아하는 분야죠. 하지만 그들은 그림을 프린트로 옮기거나 색을 따오는 정도로만 빌려 쓸 뿐이죠. 그래서 저는 입고 다니는 옷의 기능을 이용해 갤러리 벽에 걸린 작품들을 직접 거리로 끄집어 낸 거예요.”
명품 패션에서 벨크로를 사용하면 저렴해 보인다. 그럼에도 차씨가 벨크로를 사용한 건 순전히 그림 때문이다. 옷핀, 똑딱이 단추 등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그림이 울지 않도록 단단하게 잡아주는 도구는 벨크로였단다.

미술가 차경채씨는 1980~90년대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의 등 부분을 오리고 벨크로를 이용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말하자면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은 입을 수 있는 옷이자 움직이는 그림액자가 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술가 차경채씨는 1980~90년대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의 등 부분을 오리고 벨크로를 이용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말하자면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은 입을 수 있는 옷이자 움직이는 그림액자가 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럼, 왜 80~90년대 빈티지 디올일까.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50~60년대에 ‘뉴룩’을 선보이면서 새로운 여성 패션이 등장했어요. 80~90년대엔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고 지위가 높아지면서 어깨에 뽕이 들어간 파워숄더가 등장하죠. 저는 이 두 시대에 나타난 여성 패션의 혁신적인 아름다움과 힘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참고로 여러 데님 브랜드 중 리바이스를 택한 건 그림을 잡아줄 만큼 튼튼하고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란다. 이외에도 차씨의 작품엔 여러 상징성이 녹아 있다.
“패션 회사에서 인턴생활을 할 때 버려지는 옷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리퍼포싱 밸류(repurposing value)’라는 건데 다른 목적(용도)에 맞게 고친다면 새로운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죠. 오래된 빈티지 제품들을 사용하는 이유죠.”
차씨가 직접 그리는 그림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제목은 ‘스모킹 조디악’. 12개의 별자리 상징물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화가 차경채씨가 직접 운영하며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 작품을 판매하는 'eee' 웹사이트. 이미 팔린 그림에는 스티커를 붙이는 갤러리 웹사이트처럼 꾸며 놓았다.

화가 차경채씨가 직접 운영하며 빈티지 디올, 리바이스 재킷 작품을 판매하는 'eee' 웹사이트. 이미 팔린 그림에는 스티커를 붙이는 갤러리 웹사이트처럼 꾸며 놓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 탄생 별자리로 점을 보면서 동시에 수명을 단축시키는 흡연을 즐기죠. 모순이에요. 메멘토모리. 삶과 죽음은 우리 곁에 나란히 존재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페미니즘부터 환경문제까지 작품에 녹여내는 차씨의 성숙한 사고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다. 그는 2008년 고양시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의 통역을 맡으면서 ‘통역계 김연아’로 유명세를 탄 바 있다. 전직 피겨 스케이터 출신이자 스포츠학 박사인 어머니 설수영씨를 도와 중학교 3학년 나이로 통역 자원봉사를 하면서다. 차씨는 어린 시절을 부모와 함께 호주에서 지냈다.
그는 요즘도 새벽에는 미 콜럼비아 대학원 온라인 수업을 듣는다. 코로나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어려워지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선택한 방법이다. 낮에는 브랜딩 관련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코딩 학원 수업을 듣는다.
“제 작품을 살 수 있는 eee 웹사이트를 갤러리 사이트처럼 꾸민 것도 누구나 부담 없이 그림을 소유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앞으로는 순수예술과 미디어아트의 접목을 탐구할 계획입니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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