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영균, 그의 영화 인생이 한국 현대영화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09호 18면

엔딩 크레딧

엔딩 크레딧

엔딩 크레딧
신영균 지음
RHK

스타 사업가·정치인, 투혼 인생 #330편 출연, 영화판 성장에 힘써 #중앙일보 연재 ‘남기고…’가 바탕 #신성일·김지미 뒷얘기도 풍성

원로 영화배우의 ‘라떼는’(나 때는) 회고담이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총 쏘는 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하고(‘빨간 마후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둑 촬영을 감행한(‘화조’) 충무로의 그때 그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혈서로 사랑 고백한 팬들, 촬영장 안팎을 흔들었던 스캔들도 이젠 웃으며 말할 수 있다. 이 한 권에 전후 한국 영화가 꽃을 피운 1960년대부터 올 초 ‘기생충’의 아카데미 쾌거까지 우리 근현대 영화사가 녹아 있다. 영화 같은 인생을 넘어 한국 영화계를 직접 일구고 뒷바라지해온 배우 신영균(92)의 힘이다.

과장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이 대학 시절 ‘백색인’(1994)으로 난생 처음 받은 영화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신영청소년영화제 단편 부문 장려상이었다. 25년 후 2019년 11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아름다운예술인상을 받게 된 봉 감독은 “아무것도 모르고 영화라는 걸 해보겠다고 덤벼들던 시기에 저를 가장 처음으로 격려해 준 것”이라고 회고했다. 2010년 재단 설립 이래 단편영화 제작비 지원, 영화·연극인 자녀 장학금 지급 등을 아끼지 않은 신영균의 감회도 남달랐다. ‘고맙다, 충무로 후배들아. 그대들 덕분에 선배들이 흘려온 땀이 더욱 빛나게 됐다.’

1960~70년대 한국 영화 아이콘으로 군림한 배우 신영균. ’충무로의 신구 세대를 잇는 다리“였던 그의 구순 인생이 영화 그 자체다. [중앙포토]

1960~70년대 한국 영화 아이콘으로 군림한 배우 신영균. ’충무로의 신구 세대를 잇는 다리“였던 그의 구순 인생이 영화 그 자체다. [중앙포토]

책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019년 11월부터 5개월 가까이 연재한 ‘빨간 마후라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영광과 치욕의 순간 모두를 남겨야 한다”는 주변 권유에 힘입어 가감 없이 술회한 비망록이다. 그가 스스로를 정의한 키워드는 ‘노력하는 인간’. 실제로 고교 때부터 학업과 극단 생활을 병행하며 생계를 돕고 서울대 치대 졸업 후엔 치과의사를 하면서 연기 겸업을 한 게 늦깎이 영화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 주연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뒤 62년 신상옥 감독과 운명의 배를 함께 탄 ‘연산군’ 연작을 시작으로 그의 필모그래피가 60~70년대 우리 영화사다. 야성의 머슴(‘물레방아’ 등), 문제적 군주(‘연산군’ 등), 비극적 영웅(‘빨간 마후라’ 등), 방황하는 남자(‘미워도 다시 한번’ 등)를 아우르며 330여편에서 카리스마와 스타성을 뽐냈다. 이들 영화에서 어울리거나 경쟁했던 당대 톱스타(최무룡·신성일·윤정희·김지미 등)와의 비하인드 에피소드도 쏠쏠하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가 정부 검열로 지각 개봉하는 수난 속에 그의 관심은 연기를 넘어 영화·예술계 전체 파이를 키우는 데로 뻗어갔다. 금호극장, 명보극장을 인수하고 신스볼링, 한주흥산 등을 설립해 사업가로서 성공을 일군 뒤 1996년 정치에 입문, 제15·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그런 역할을 했다. 2010년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과 제주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 원대 자산을 쾌척하기까지 영화 사랑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후회 없이 살았다”는 그의 남은 소망은 좋은 작품으로 또한번 연기 투혼을 불사르는 것. 그의 인생에서 ‘엔딩 크레딧’은 미래형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