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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신윤복의 조선 모나리자가 지닌 보석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민은미의 내가 몰랐던 주얼리(54)

신윤복(申潤福, 1758~1813 이후)의 미인도와 드디어 조우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재개관 특별전으로 열린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 보물전 2017-2019’에서다. 보물 제1973호 ‘신윤복 필(筆) 미인도’는 조선의 미인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19로 인해 관람인원수를 축소해 온라인 사전 예매 방식으로 운영했는데, 전회 매진됐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자 박물관 측은 전시를 2주 연장했고, ‘신윤복 필 미인도’를 마지막 7일간(10월 5일~10월 11일) 다시 특별 공개했다. 바로 이 연장 기간에 겨우 예매에 성공해 미인도를 만날 수 있었다.

신윤복 필 미인도. [사진 문화재청]

신윤복 필 미인도. [사진 문화재청]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신윤복은 여성의 풍속을 많이 그렸던 도화원(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 화원이었다. 그의 미인도는 여성의 전신을 초상처럼 그린 최초이자 드문 작품이다. 조선 그림의 특징이기도 한 담채의 차분한 아름다움이 짙게 밴 신윤복의 미인도는 여인이 취한 다소곳한 자세와 가체(머리 모양을 꾸미기 위해서 덧넣는 딴 머리)가 얹힌 잘 빗질 된 머리 형태, 정돈된 옷매무새에 의해 아름다움이 더욱 배가된다.

옅은 색 저고리에 쪽빛 치마는 다소 심심해 보이지만, 검자줏빛을 띤 머리 오른편의 댕기와 남색 끝동을 단 삼회장저고리의 자줏빛, 특히 선홍이 돋보이는 속고름이 절묘한 악센트 효과를 준다. 신윤복의 미인도 속 여인이 앞으로 길게 늘어뜨린 흰 치마끈은 당시에 유행하던 차림이었다고 한다. 다만 전형적인 한국의 미인상으로 보이는 미인도 속 여인의 신분은 알려진 바 없다. 꿈꾸는 듯한 눈빛과 무표정한 시선으로 ‘조선의 모나리자’로도 불린다.

그림 속의 여인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노리개이다. ‘미인도’의 미인이 지닌 노리개는 삼작(세 개의 노리개가 한 벌이 되게 만든 노리개)이 아닌 단작이지만, 알이 굵은 구슬 세 개로 엮은 ‘삼천주’ 노리개다. 미인이 찬 삼천주는 어떤 것이었을까.

왕비만이 착용한 삼천주

삼천추. 칠보삼천주 노리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삼천추. 칠보삼천주 노리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미인도’의 미인이 착용할 만큼 삼천주는 귀한 장신구였다. 삼천주의 삼천이란 말은 구슬이 삼천 개란 뜻이 아니라, 불교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상징하는 말이다.

불교에서 삼천대천세계란 거대한 우주 공간을 나타내는 술어로 소천·중천·대천 세 종류의 세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끝없는 세계가 부처가 교화하는 범위가 된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삼천주의 구슬은 큰 진주나 밀화(호박), 옥같이 귀한 것으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미인도’의 미인이 지닌 노리개의 알은 유난히 굵은 구슬로 엮은 삼천주였다. 구슬의 재질이 무엇인지는 단정해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선 노리개를 비롯해 전통 장신구 1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보나장신구박물관 김명희 관장은 “‘미인도’ 속 자색의 구슬은 붉은색을 띠는 밀화(호박)나 금파(투명한 호박)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구슬이 자색을 띠고 있으며 흰색 문양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칠보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구슬의 재질이 어떤 것이었든 삼천주는 주로 왕실, 그곳에서도 왕비만이 착용할 수 있던 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왕비 외에 기녀가 비공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미인도’의 주인공인 여인의 신분은 알려진 바 없지만 보나장신구박물관 김명희 관장은 “신윤복이 그린 수많은 작품에 등장하듯 아마도 미인은 기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인의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김 관장은 “옛 여인의 장식품을 보고 있으면 그 시절 미적 수준에 감탄하게 된다. 여인이 옷에 차고 다녔던 장신구는, 한국이 가장 화려하며 세계적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노리개는 다소 심심해 보이는 한복의 색조에 화사함을 더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래 부녀자의 몸치장에 쓰인 대표적 장신구인 노리개는 실생활에서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허리에서 한복에 구심점을 주면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해왔다. 조선시대에도 패션의 완성은 주얼리였던 셈이다.

주얼리 마켓 리서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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