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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국 뉴욕대 유혜영 교수의 D-22 미 대선 진단

트럼프의 ‘낯선 미국’ 고착되나, 바이든의 ‘익숙한 미국’으로 돌아가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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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1월 3일 치르는 미국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훨씬 큰 관심이 쏠린다. 이번 선거에 ‘지금껏 누구도 겪어본 적 없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74)의 재선 여부가 달렸기 때문이다.

트럼프 개인·정책 신임투표 성격 #재선되면 다양성의 단절을 의미 #권력의 견제와 균형 원칙 흔들려 #바이든 ‘더 나은 미국 재건’ 먹혀

이번 선거는 트럼프 개인에 대한 신임투표를 넘어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년간 보여준 정책과 비전·가치에 대한 신임투표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면 이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미국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지난 4년간 우리가 목도한 ‘낯선 미국’이 트럼프라는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의 당선에서 비롯된 일탈이 아니라, 새로운 미국의 기조로 자리매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트럼프(左), 바이든(右)

트럼프(左), 바이든(右)

첫째, 트럼프 재선은 흔히 ‘멜팅 팟(Melting pot)’으로 불려온 미국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더 나은 경제와 교육의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다양성을 포용해준 미국은 그동안 기회의 땅이었다.

미국 인구의 14%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다. 1965년 미국 정부가 출신 국가별 이민자 할당제를 없앤 뒤 이민자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인종 구성이 달라졌다.

1950년 90%에 달했던 백인 비중은 2010년에는 72%로 줄었고, 2050년이 되면 50%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인종 구성의 다양화를 반기는 사람도 있지만, 백인이 주류였던 미국 사회의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4년 전 이들의 거부감을 효과적으로 공략해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에 무슬림 국가 출신의 입국을 금지했다. 미국 영주권을 비롯한 비자 발급 요건을 더 까다롭게 만들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미국인의 일자리를 지키겠다며 고숙련 노동자에게 발급되는 H1-B 비자와 영주권의 신규 발급을 중지하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트럼프가 재선되면 이민·취업·유학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다양성과 역동성이 사라지고 미국의 매력은 떨어질 것이다.

국제 협력 이끈 리더국가 갈림길에

둘째, 트럼프 재선은 냉전 시대부터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구심점이자 국제 사회에서 협력을 이끌던 리더였던 기존 미국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 (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미국이 맡던 국제 사회의 리더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파리 기후협약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고, 중국과는 관세 전쟁을 벌이는 등 보호무역과 고립주의를 주창했다.

세계인의 눈에 비친 미국의 모습도 트럼프 집권 이후 오바마 정부 때보다 부정적으로 변했다. 코로나19에 형편없이 대응하는 모습에 강대국 미국의 위상은 추락했고, 호감도가 낮아졌다. 그러든 말든 트럼프는 재선되면 미국 우선주의 노선을 계속 걸으며, 국제 협력에서 더욱더 발을 뺄 것이다.

셋째, 트럼프 재선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칙에 따라 설계된 미국 정부 제도의 전통과 단절함을 의미한다. 흔히 미국 대통령을 세상에서 가장 권력이 센 사람이라고들 하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가장 우려한 건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과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건국의 아버지들은 행정·사법·입법부가 서로 견제하도록 정부 제도를 고안했다. 견제와 균형의 원칙은 때로는 변화의 속도를 더디게 했지만, 미국이란 제도에 지속성과 안정감을 부여해왔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법부나 입법부보다 위에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트럼프는 200년 넘게 지속해온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무시해 왔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의원이나 야당은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철저히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통령이 단독으로 행사할 수 있는 행정명령도 남발했다.

실업률, 흑인사망 사건 트럼프에 악재

4년 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로 유권자의 마음을 샀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는 ‘위대해진 미국을 계속 유지하자(Keep America Great)’라는 구호를 들고나왔다.

민주당은 치열한 당내 경선을 거쳐 47년 정치 경력의 백인 남성 조 바이든(78) 전 부통령을 후보로 내세웠다. 카멀라 해리스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바이든 후보는 ‘더 나은 미국을 재건하자 (Build Back Better)’는 구호를 정했다. 트럼프가 망가뜨린 미국의 제도와 경제·사회를 재건하되, 단순히 트럼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전보다 더 나은 미국을 만들자는 호소다.

여름까지만 해도 이번 대선의 핵심 쟁점은 단연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과 구조적인 인종 차별 문제였다. 전 세계 인구 78억 명 가운데 미국 인구는 약 4%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숨진 107만 명 가운데 21만 명이 미국인이다. 20%에 육박한다.

소득 수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격차가 큰 미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은 치명적이었다. 민주당은 트럼프 행정부가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화를 키웠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종일관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 부르며 중국 탓만 했다. 전문가들의 끈질긴 조언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을 끝내 공식적으로 권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멈춰 서면서 미국 경제도 큰 타격을 입었다. 코로나19 전까지만 해도 지난 70년간 가장 낮은 실업률(3.5%)을 자랑하며 주식 시장 호황 덕분에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은 떼어 놓은 당상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갑자기 실업률이 두 자릿수로 증가하고 4000만 명이 실업 급여를 신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랴부랴 경제를 재개해야 한다고 주 정부를 압박했지만, 코로나19 속에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한 학교도 식당도 이발소도 제대로 예전처럼 여는 것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지난 5월 백인 경찰관이 무장하지 않은 흑인 시민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공권력이 자행하는 폭력과 그 기저에 있는 뿌리 깊은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두둔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트럼프 대통령에게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시위가 확산해 재선 가능성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긴즈버그 빈자리 놓고 이전투구

그런데 지난 9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87세로 사망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전의 기회가 왔다. 대법원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낙태·동성결혼·오바마케어를 비롯해 미국 사회의 기본적인 방향에 대법원 판결이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의 권한 중에서 종신직인 대법관 임명권을 가장 중요한 권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원래 미국 대법관 9명 가운데 보수 성향이 5명, 진보 성향이 4명이었다.

그런데 긴즈버그 대법관의 빈자리에 트럼프 대통령이 재빨리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지명했다. 상원 인준을 받으면 대법원은 보수 6, 진보 3의 압도적인 보수 우위 구도로 바뀌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배럿 판사 임명은 코로나19나 인종차별 문제를 덮을 수 있는 카드이자 보수 성향 유권자들을 결집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 호재였다.

지난 9월 29일 열린 대선 후보 1차 TV 토론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토론이었다는 혹평을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했다. 두 후보의 정책이나 비전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지 못해 내실이 떨어지는 토론이었다.

사실 정치학계에선 TV 토론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선 토론을 보고 그제야 지지 후보를 정하거나 원래 지지하던 후보를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유권자들이 이번에는 대부분 일찌감치 마음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코로나 감염 막판 변수로

지난 2일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19 양성 판정 소식은 선거 막판 변수가 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10월에 코로나19 백신을 깜짝 발표하는 반전 카드를 쓸 거란 전망이 있었는데, 오히려 트럼프 자신의 코로나19 확진이 10월의 반전 뉴스가 돼버렸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공석을 서둘러 메우며 대법관 임명 이슈로 코로나19를 덮어보려 했지만, 대통령 부부와 백악관 참모진 등이 무더기로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코로나19가 다시 가장 큰 대선 이슈가 됐다.

물론 정치적 양극화, 트럼프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 40%를 고려할 때 대통령이 코로나19에 걸렸다고 표심이 요동칠 가능성은 작지만, 미국 경제와 선거 과정에 불확실성이 커진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우편 투표 확대로 인한 선거 부정 우려를 제기하며 자신이 질 경우 평화적 정권 이양을 약속하지 않고 있다. 전 세계는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슈로 떠오른 희한한 미국을 지켜보고 있다. 11월 3일, 미국 유권자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유혜영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시카고대 석사. 하버드대 박사(정치경제학). 미국정치 전공.

유혜영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