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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약 접근성, 환자중심으로 끌어 올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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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약리학과 교수

이형기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약리학과 교수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최근에 개발된 혁신 신약의 성과는 눈부시다. 이전에는 치료가 어렵던 질환이 완치되기도 한다. 신약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고 삶의 질을 개선한다. 뿐만 아니라, 신약은 건강 수준을 올리고 총 의료비 지출을 줄여 경제적 가치 창출에 기여한다. 환자가 신약을 쓸 수 있도록, 즉 신약 접근성을 적극 보장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한국의 신약 접근성은 여전히 낮다. 지난 십년 동안에 전세계에서 개발된 신약 356 개 중 국내에서 허가돼 보험 급여를 받는 의약품은 단지 128 개(36%)에 불과하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같은 의약 선진국(A7 국가)의 평균인 200 개(58%)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이처럼 환자가 쓸 수 있는 신약의 숫자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작은 이유가 뭘까? 보험 급여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6~2018년 국내에서 허가된 신약 중 50% 정도만 건강보험의 급여 목록에 등재됐다. 요컨대 허가를 받은 신약 중 절반이 보험 급여를 받는 데 3~4년이나 걸렸고, 절반은 아직도 급여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2006 년에 도입된, 비용효과성이 입증된 신약에만 보험 급여를 하는 선별등재제 때문이다.

물론 무한정 급여를 인정해 건강보험 재정을 바닥낼 수는 없다. 그러나 선별등재제가 실시된 지 15 년을 바라보는 지금, 꼭 필요한 보험 급여를 적기에 제공해 환자의 신약 접근성을 높일 수는 없는지 개선책을 고민해야 한다.

첫째, 점증적비용효과비(ICER) 임계치를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신약이 질병을 치료해 1년 더 산다고 가정할 때 사회가 얼마나 추가 비용을 부담할 준비가 됐는지 화폐 가치로 환산한 게 ICER이다. 국민소득이 증가했고 삶의 질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혁신 신약을 요구하는 환자가 더 많아졌지만 현행 ICER 임계치는 십여년 전 수치 그대로다. 한편 신약의 사회경제적 가치가 분명한 중증 및 희귀질환에는 더 높은 ICER 임계치를 인정하거나 적어도 구간의 형태로 신축 적용할 필요가 있다.

둘째, 경제성 평가를 하지 않고 우선 보험 급여를 해 주는 위험분담제의 대상 질환을 확대하고 신약의 보험 급여를 촉진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중증 만성질환에도 위험분담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환자의 목소리가 높다. 아울러 신약 말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면 먼저 신약에 보험 급여를 하고 나중에 평가 기준과 약가를 재조정하는 ‘선급여–후평가’ 제도를 시범적으로 실시할 수 있다. 급여 여부와 약가를 결정할 때 정부와 제약사 사이에 협상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제도도 필요하다.

셋째, 상대적으로 고가인 국내 제네릭 약가를 시장 기능에 맡겨 인하를 유도하고 과학적 타당성과 경제적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의료서비스에 낭비되던 건강보험 재정 지출을 줄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중증 및 희귀질환자의 신약 접근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건강보험 재정을 재분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의료비를 지원하는 별도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검토돼야 한다. 여전히 신약 접근성이 낮다면 사회적 합의를 거쳐 건강보험 이외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 정부의 리더십 발휘가 중요하다.

신약 접근성은 ‘환자 중심’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환자가 건강해지면 환자와 가족이 질 높은 삶을 누린다. 결국은 국민 건강이 증진되고 사회 전체가 부담하는 비용은 준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의료서비스에 급여를 ‘많이’ 적용하는 대신, 혁신 신약이 꼭 필요한 환자에게 혜택을 ‘빨리’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때이다.

- 이형기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약리학과 교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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