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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하고 찍은 동영상도, 강요땐 강간보다 세게 처벌한다

중앙일보

입력

[사진 연합뉴스TV]

[사진 연합뉴스TV]

“연예인 인생 끝나게 해 주겠다. 동영상을 제보하겠다.”

고(故) 구하라의 전 남자친구 최모씨는 두 사람이 다툰 밤, 이렇게 말하며 고인에게 성관계 동영상을 전송했다. 또 구씨에게 “너를 관리하지 못한 죄로 지인을 당장 불러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라”고 요구했다. 겁먹은 구씨는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최씨가 말한 지인에게 와 달라고 연락하는 등 의무 없는 일을 해야 했다. 최씨는 1심에서는 집행유예를, 2심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구씨의 유족은 “왜 이렇게 관대한 형량을 선고했는지 납득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만약 지금 구씨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전 남자친구는 훨씬 큰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15일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확정했는데, 기존 성범죄보다 엄중한 기준을 내놨기 때문이다.

촬영물 이용한 강요 혐의, 강간보다 엄하게 처벌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구씨가 피해를 볼 때는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강요 범죄에 대한 처벌 조항 자체가 없었다. 형법상 협박‧강요죄만 적용됐고, 협박범죄의 양형기준은 기본 징역 2월~1년이다.
지난 5월 동의하에 찍었다고 하더라도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촬영물을 이용해 협박‧강요한 자를 성폭력 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신설됐다. 양형기준으로 협박죄는 기본 징역 1~3년, 강요죄는 기본 3~6년이 책정됐다. 특히 강요죄의 경우 강간보다도 양형기준이 높다. 강간의 기본양형은 2년 6월~5년이다. 양형위는 “죄질이 매우 불량한 사정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사귈 때 동의하고 찍은 성관계 동영상을 헤어진 연인에게 협박 없이 전송만 했더라도 통신매체 이용 음란죄로 처벌 가능하다. 이 경우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했다면 특별가중인자로 고려돼 최대 징역 2년까지 선고할 수 있다.

술 마셨으니 감경? 더는 안 통한다

2008년 조두순은 8세 여아를 납치한 뒤 성폭행해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조씨가 술에 만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며 형이 감경돼 논란이 일었다.

만약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만취 상태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등 범죄를 저지른 경우 더는 심신미약이 감경요소로 인정받지 못한다. 범행 면책사유로 삼기 위해 일부러 술을 마셨다면 오히려 형을 가중하는 요소로 반영된다. 심신미약이 감경요소로 적용될 수 있는 건 정신질환자 등 형법이 정한 심신장애인뿐이다. 이는 몰래카메라 범죄, 허위영상물 반포 등 다른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에 모두 적용된다.

‘n번방’ 사건에 적용하면 형량 높아질 요소 가득

조주빈과 공범들 기소 혐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조주빈과 공범들 기소 혐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적용되는 특별가중요소를 살펴보면 ‘n번방’ 주범 조주빈에게 해당하는 사항이 많다.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범행을 주도적으로 지휘하는 등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경우 ‘범행수법이 매우 불량하다’고 본다. 또 조씨가 “(성착취 영상을) 브랜드화할 요량이었다”고 말하는 등 범행 자체를 즐겨서 저지른 경우 ‘비난할 만한 범행동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전에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조씨처럼 다수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범행한 경우는 감경 요소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범죄자들이 처벌을 줄이기 위해서는 피해확산 방지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유포된 성착취물을 비용과 노력을 들여 자발적으로 회수한 경우가 해당한다.

문제는 ‘n번방’ 사건처럼 이미 벌어진 일에는 새로운 양형기준을 소급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새 양형기준안은 오는 12월 최종 의결돼야 효력이 생긴다. 지난 4월 기소된 조씨 등은 적용 대상이 아니다. 물론 재판부가 참고할 수는 있다. ‘디지털 성범죄와 양형’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백광균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양형기준을 강하게 만든 건 앞으로는 디지털 성범죄자들을 엄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며 “앞으로는 이들이 감경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실질적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시그널”이라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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