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김정은을 각성케 하는 길

중앙일보

입력 2020.09.1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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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이 쓴 『격노(Rage)』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국을 깔보는 내용이 나온다. 김정은은 지난해 8월 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현재든 미래든 남한 군대는 나의 적이 될 수 없다”며 “우리는 특별한 수단 없이도 강한 군대를 갖고 있으며 사실 한국군은 내 군대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2018년 3월엔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에게 미국과의 전쟁에 나설 준비가 됐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한국군을 한 수 아래로 여기는 까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보기에 핵무기를 가진 북한은 전략 국가로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하거나 전쟁을 할 수 있지만, 핵무기가 없는 한국은 장기판의 졸처럼 전략 국가들의 수 싸움에 운명이 결정된다.

군사력·경제력서 열세인 북한은
핵 보유로 체제 경쟁 승리 주장
강한 대북 제재만이 비핵화 유도

김정은의 주장은 한마디로 착각이다. 한국은 재래식 전력에서 북한을 압도한다. 한반도 상공을 감시하는 오산의 공군 작전사령부 중앙방공통제소(MCRC)의 레이다를 보면 남한 상공엔 빽빽이 전투기와 여객기가 표시되지만, 북한 상공엔 비행기가 거의 없다. 북한은 항공유가 부족해 전투기 조종사들이 훈련을 거의 못한다. 한국이 보유한 F-35나 F-15 등 전투기 성능은 북한의 주력 전투기 미그-29를 크게 웃돈다. 해군과 육군의 무기나 장비들도 한국이 월등하다. 병력 면에서 북한(128만여명)이 한국(59만여명)의 두 배 이상이지만 현대전에선 군인 수보다 정보·첨단무기 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걸 고려하면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경제력에서 한국은 북한의 50배를 넘어 상대가 안 된다.

또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는다. 김정은도 한국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미국의 핵 보복으로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북한이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는다.

서소문 포럼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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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김정은이 한국을 업신여기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문 정부는 그동안 북한과의 대화에 매달려 북한의 도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 북한이 핵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한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유럽 등 국제사회에 제재 완화를 요청했다가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16일 9·19 평양공동선언 2주년을 앞두고 판문점을 방문해 “북측도 나름대로 (9·19 남북군사) 합의를 준수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서해 창린도 해안포 사격 훈련과 올해 6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 북한의 일방적 군사합의 파기 행태를 고려하면 어처구니없는 발언이다. 정부의 대북 정책이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건지, 아니면 남북 대화 자체를 목표로 한 건지 헷갈릴 정도다.

문 정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남북 간 체제 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고 선언했다. 김정은은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다. 핵무기가 남북 체제 경쟁에서 북한을 우위에 서게 했다고 믿는다. 북한이 한국을 핵으로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면 북한 비핵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안보 불안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남북 관계가 개선된다.

김정은에게 핵은 체제 생존을 위한 ‘만능의 보검’이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게 하려면 강한 대외 압박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 유엔 안보리 제재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경제 협력의 길은 막혀 있다. 문 정부가 이를 우회해 지원 방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북한 비핵화를 사실상 방치하겠다는 뜻이다. 국민과 후손에게 큰 죄를 짓는 일이다.

지금은 국제사회 공조로 대북 제재의 그물을 촘촘히 해 북한이 더는 못 견딜 정도가 되게 해야 한다. 북한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협력 제안으로 한국의 국격을 스스로 깎고 국제사회의 외면을 사는 자충수를 둬서는 안 된다. 제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미·중의 협력을 유도하고 국제사회의 일치된 대응을 위해 외교 역량을 기울일 때다.

신각수 전 외교부 차관은 “지금은 경제적·외교적 대북 압박에 치중할 때”라며 “김정은이 핵·경제 병진 노선으론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중앙일보 9월 15일자 ‘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정부는 북한 비핵화라는 전략 목표를 확고히 한 가운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살피고 추진해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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