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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토마토·오이·망고…냉장고서 저온장해 겪는 식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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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11)

냉장고의 본질적인 기능은 음식 재료를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존하고 저장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러한 편의성 때문에 굳이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될 식품까지 무조건 넣기도 한다. [사진 pixnio]

냉장고의 본질적인 기능은 음식 재료를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존하고 저장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러한 편의성 때문에 굳이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될 식품까지 무조건 넣기도 한다. [사진 pixnio]

냉장고 프로젝트에서는 편리함 속에 감춰진 현대인의 욕망과 소비에 중독된 습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물로 냉장고를 바라본다. 편리한 문명사회를 선택한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은 피할 수 없는 인과관계이다. 한 전자제품의 탄생이 인간과 환경에 얼마나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를 면밀하게 분석하려고 한다.

냉장고의 본질적인 기능은 음식 재료를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존하고 저장하는 데 있다. 냉장고가 생기면서 우리는 번거롭게 재료를 미리 손질해서 건조하거나 소금에 절일 필요가 없어졌다. 매일 장을 보지 않아도 되고, 반찬을 한꺼번에 만들어 놓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데워서 먹을 수 있다. 더구나 시원한 음료나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힐 수도 있게 되었다.

반면 이러한 편의성 때문에 냉장고를 신봉하는 맹신으로 이어져 굳이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될 식품까지 무조건 처박아 놓게 되었다. 일반적인 냉장고 내부온도는 1℃에서 4℃ 사이인데, 토마토·레몬·애호박은 10℃, 가지·오이는 7℃, 감자·수박은 4℃, 고구마는 13℃ 이하에서 보관하면 저온 장해를 겪게 된다. 망고, 아보카도,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 과일은 냉장고가 아니라 상온에 보관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우리는 만능 냉장고를 신뢰하기 때문에 냉장고로 직행한다.

그러다 보니 잔뜩 구매한 재료는 꼭꼭 숨겨둬 어디에 뒀는지 까먹게 되고, 차곡차곡 쌓여 썩어간다. 이렇게 묵혀두다가 결국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커져만 간다.

한국환경공단에 따르면 한국에서 버려지는 쓰레기 중 약 30%가 음식물 쓰레기라고 한다. 이 중 70%가 가정 및 소형 음식점에서 발생하며 그 음식물 쓰레기 중 약 10%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보관만 하다가 버린 것들이라고 한다. 한 주에 10만 원어치 장을 봤다면 만 원은 그냥 버리는 셈이다.

냉장고의 경우 24시간 동안 가동하다 보니 가전제품 중에서도 소비력이 가장 높다. 그렇다고 냉장고를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사실 남용되는 부분이 더 많다. 한국의 겨울철을 생각해보자. 집 밖의 온도는 영하 10℃인데 아파트 내부는 24℃를 웃돌게 해놓고, 다시 부엌에 있는 냉장고는 온종일 가동하게 한다. 과연 효율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쓴다고 할 수 있을까. 냉장고 사용의 모순이다.

일본의 발명가인 후지무라 야스유키는 몽골 유목민을 위해서 맞춤 냉장고를 개발했다. 초원에서 전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냉기 자연대류방식 냉장고’이다. [사진 pixabay]

일본의 발명가인 후지무라 야스유키는 몽골 유목민을 위해서 맞춤 냉장고를 개발했다. 초원에서 전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냉기 자연대류방식 냉장고’이다. [사진 pixabay]

물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사시사철 눈이 오고 꽝꽝 어는 알래스카에서도 냉장고는 거래된다고 말할 수 있다. 냉장과 냉동에는 차이가 있다. 냉동해야 하는 식재료도 있지만, 냉장 보관해야 하는 재료도 있다. 냉장은 단순하게 얼리는 게 아니라 온도 유지가 중요하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알래스카에서도 냉장고에 대한 수요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알래스카에 사는 고객에게는 냉장고를 냉동칸 없이 냉장칸만 넓혀서 판매하면 어떨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체형이나 양문형 냉장고처럼 천편일률적인 설계가 아니라 사용자의 환경을 고려하여 만든 맞춤 냉장고로 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발명가인 후지무라 야스유키는 몽골 유목민을 위해서 맞춤 냉장고를 개발했다. 이 발명가는 냉장고를 사용하기 힘든 조건인 초원에서 전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냉기 자연대류방식 냉장고’를 만들었다. 밤낮의 일교차가 극심한 초원의 기후에 적합한 방식을 고안했고, 결국은 한낮 기온이 30℃인 여름에도 냉장고 내부를 4℃ 이하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 대초원의 유목민이든, 광활한 호수에서 수상생활을 하는 미얀마 인레 호수(Inle Lake)의 인따족(Intha people)이든, 험준한 산악지역에 들어가 계단식 논(rice terrace)을 만든 필리핀 이푸가오족(Ifugao people)이든, 인류는 그동안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살아왔다. 주어진 환경에 맞는 생업활동을 하고 도구(民具)를 만들어 사용했다. 우리네 민구(民具)의 대표적인 소재는 짚풀이다. 도작(稻作) 문화권에서 짚풀은 가장 흔했기 때문에 생활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초가지붕, 짚신, 망태, 달걀 꾸러미, 삼태기 등 집 안 구석구석 짚으로 만든 생활용품이 가득했다.

일상생활용품은 대부분 주변에서 얻은 소재로 만들었고 사용 뒤 버리면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가전제품도 대량생산과 이윤추구에만 매달리지 않고 지역 생태계를 고려하면서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온종일 돌아가는 냉장고의 전력 낭비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후지무라 박사에 따르면,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외부로부터 침입한 열을 다시 식히는 데 에너지의 90%가 낭비된다고 한다. 냉장고 속의 공기를 식혀서 저장물을 차갑게 만든다는 실제 목적에 사용된 에너지보다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에너지가 더 많다는 뜻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냉장고는 공기를 식혀서 저장물을 차갑게 만드는 원리인데, 공기를 매개로 저장물을 식히는 게 여간 쉽지가 않다. 내부의 공기가 차가워지기도 전에 냉장고 문을 여닫으면 이때까지 열심히 식혀왔던 냉장고 속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래서, 냉장고를 쓰라는 거야, 쓰지 말자는 거야?” 이러한 질문에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사실 냉장고 프로젝트는 이러한 이항대립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냉장고의 탄생과 함께 성장한 소비주의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더욱 중요하다고 답할 수 있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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