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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태진의 특별기고

‘생계형 친일’ 활용하자던 김구·김일성도 친일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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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친일 논쟁을 계기로 본 해방정국의 진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통치 35년 만에 해방을 맞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통치 35년 만에 해방을 맞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8·15 행사 전후 친일 논쟁이 새삼 불거져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좌·우 싸움이 얼마나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반대쪽의 출생 자체를 문제 삼기까지 한다. 당파주의라도 한참 도를 넘는 한심한 역사 논쟁이다. 국립묘지 안장 자격도 새로 따져 들어낼 것 들어내자고 하니 글로벌 시대에 웬 부관참시란 말인가?

항일투쟁 에너지 한데 모이고, 주의·주장 극성했던 해방 정국 #객관적 연구없이 자신의 입지 위해 자의적 해석·폭언 말아야 #근대 자유주의로 나가려던 조선 망가트린 일본 행위는 응징하되 #평화 공존의 세계로 인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음을 망각말아야

해방 정국의 실상을 살피기 위해 신문 자료를 펼쳐 보면 참으로 험난한 역사란 소회를 금할 수 없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미·소 양국 군 진주, 미 군정 출범, 이승만 박사의 귀국,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의 본의 아닌 개인 자격 환국, 반탁·찬탁의 뜨거운 대치, 62회나 공전한 미·소 공동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그리고 동족상잔의 6·25 동란, 세상에 어디 이런 난마 같은 역사가 있었던가? 아무리 헝클어진 아수라의 역사라도 큰 가닥은 잡아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다. 그 소임의 고지는 저 멀리 아득하지만, 역사가로 연명하기 위해 굵은 동아줄 서너 개 골라 소견을 적어본다.

첫째, 좌·우의 정통성 문제다. 해방 정국에서 좌파, 중도 좌파가 우세했던 것은 사실이다. 해방과 동시에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쌀(배급) 투쟁’과 ‘토지 투쟁’을 이슈로 내건 것이 주효하여 좌익 우세의 정국이 만들어졌다. 여론의 70% 정도가 그쪽으로 기울었다.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일제의 잔혹한 파시즘이 남긴 유산이다. 1930년대 이후 천황제 파시즘이 날로 기세를 더할 때, 일본 안에서도 좌파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코민테른이 영구혁명의 기치로 파시즘과 싸우는 약소민족 좌파를 지원하여 우리 항일 전선도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코민테른 쪽과 선을 긋고 독자적으로 국제적 입지 확보를 위해 사투를 벌이면서 좌파에 맞섰다.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 좌파가 우세를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앞 시대의 유산으로 내일을 위한 답은 아니었다. 1980년대 동구권의 붕괴가 이를 입증했다.

둘째, 김구는 왜 평양으로 갔던가? 나는 선생이 남북 협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38선을 넘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헛일이 될 줄 알면서 만류를 뿌리치고 먼 길을 나섰다. 미소 냉전 아래 국토와 민족이 두 동강 나는 현실을 두고 누군가 이를 막아 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통절한 사명감의 결행이었다.

1948년 3월에 평양으로 가고 5월에 서울로 돌아온 뒤, 칩거 끝에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기념일에 한시(漢詩) 한 수를 지어 소회를 남겼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니 어찌 어지러운 걸음 아니겠는가? 오늘의 나의 발자국이 언젠가 뒷사람들이 걷는 길이 될 것이다.”(번역-필자)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항일운동의 길을 활짝 열었듯이 자신의 평양행이 뒷날 민족 분단의 현실을 타개하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선생은『나의 소원』에서 공산주의자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밝혔다.

셋째, 좌·우 가운데 누가 역사의 승리자였던가? 미 군정은 출범 초기에 좌파가 추동하고 있는 ‘쌀 투쟁’과 ‘토지 투쟁’의 대중적 반향을 보고 이에 대한 대책을 바로 세웠다. 1945년 10월 26일 이 방면 전문가로 이훈구(李勳求)를 찾아 군정청의 농상국장(농무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동경제대 농학부를 거쳐 1927년 미국 캔자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박사학위를 받고 1935년 『한국의 토지 활용과 농촌경제』라는 책(영문)을 냈다. 군정 당국은 그의 저술을 토대로 한국의 소작농 비율이 세계에서 유례없이 높다는 것, 그 원인이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이를 해소하는 개혁안을 준비하게 하였다.

1946년 2월 군정청 고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아더 번스와의 협력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 번스는 1928년부터 6년간의 YMCA 농촌갱생 활동으로 한국 농촌 실정에 정통했다. 미 군정은 농무부의 개혁안으로 농지개혁을 단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이 일은 한국의 새 정부 이름으로 해야 할 일이란 의견이 우세했다. 군정 당국은 이미 나돈 소문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일을 감추었다.

1947년 8월 15일을 기하여 군정 당국은 좌익 정당 활동을 금지하였다. 남북 분단이 현실이 된 이상 좌익은 북으로 무대를 옮기라는 뜻이었다. 이 조치가 농지개혁을 한국의 새 정부의 일로 결정한 시점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흥미롭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내각 구성에서 박헌영을 비판하고 전향한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하였다. 조봉암은 강정택을 차관으로 발탁하여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게 하였다. 강정택은 동경제국대학에서 근대 조선 농업사회를 연구한 전문가였다.

새 정부 출범 후 10개월 만인 1949년 6월 21일 제헌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고, 이듬해 3월 25일 개정 법률 공포, 4월 28일 시행 규칙 공포 등이 이루어졌다. 빠른 진행은 전적으로 이훈구가 중심이 된 군정 농무부의 사전 조사 덕분이었다. 이훈구는 제헌 국회의원이 되어, 토지 소유 상한과 농산물 상환 연한에서 생긴 변동을 군정 원안 쪽으로 개정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두 달 뒤, 6·25 동란이 발발하였다. 대한민국의 농민은 어디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최대 3정보의 토지 소유자가 될 수 있는 꿈을 현실로 겪었다.

끝으로, 친일문제를 보자. 일선 전투 사령관은 참모의 중요성을 안다. 그 때문인지 광복군을 이끈 김구 선생과 빨치산 투쟁의 김일성은 다 같이 ‘생계형 친일’은 새 국가의 유용한 인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랬다고 누가 두 사람을 친일이라고 하겠는가? 일종의 친일 역사관인 식민지 근대화론, 과연 정당한가.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한국은 노력조차 하지 않아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 인식,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 안타깝다. 이 문제는 학계에서 1960~70년대에 이미 비판이 끝난 것인데 80년대 일본 극우세력 득세를 배경으로 다시 머리를 디밀었다. 그간 새롭게 밝혀진 우리의 자력 근대화 성과의 이모저모를 여기서 늘어놓을 수 없지만, 우리와 저들의 근대화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일본이 서양기술 문명 수용에 먼저 나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근대화는 주변국 침략을 위한 힘 쌓기였다. 메이지 집권세력 조슈(長州) 계의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일본이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기술 문명을 속히 배워 국력을 키워 주변 나라들을 그들보다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침략 대상으로 홋카이도·류큐·타이완·조선·만주·몽골·중국을 열거하고 마지막으로 태평양으로 나가 캘리포니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진출하라고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등 그의 제자와 후배들은 놀랍게도 이를 순서대로 실천에 옮겨 반세기 동안 8회나 큰 전쟁을 일으켰다. 이 ‘기획’ 침략주의는 결코 구미 제국주의와 같은 것일 수 없다. 저들은 천황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 대동아 건설, 세계 팔방이 모두 천황의 품에 들어오는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실현하고자 파시즘의 갑옷을 두껍게 걸쳤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 침략주의에 맨 먼저 짓밟혀 완주 기회를 잃었던 것이지,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 황제는 1909년 3월 15일 대한제국은 나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만성(萬姓)의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자유라야 민(民)이며, 독립이라야 국(國)이라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국시로 밝히면서 힘 모아서 나라 지켜주기를 당부하였다. 엄숙한 주권 이양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근대를 자유민주주의로 나아간 반면, 저들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제를 자랑하면서 주변국 복속의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우리 선조, 선배들의 항일 투쟁은 세계사상 유례없는 천황제 파시즘의 불의와 잔혹과의 대결이었다. 자유 수호의 이 숭고한 대행진을 식민지 근대화론 따위로 지워버리려 드는 것이 가소롭다.

항일 투쟁의 에너지가 해방 정국 한자리에 모였다. 주의·주장의 다툼이 극성하였다. 이 특별한 역사는 좌·우의 시각을 떠나 객관적 연구 대상으로 민족 발전을 위한 반추의 자산으로 삼아 마땅하다. 이 소중한 유산을 두고, 오늘의 제 입지를 위해 자의적 해석이나 배격의 폭언을 가하는 것은 망동이다. 제국 일본이 우리의 근대 행진을 망가트린 행위는 응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평화 공존의 세계로 인도할 자격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도 잊지 말자.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