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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40m 태풍이 60m 초강풍으로…“빌딩풍은 신종 재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초속 40m의 강풍을 동반한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잇따라 부산을 강타하면서 ‘빌딩풍(風)’이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해안가 초고층 건물 난개발로 빌딩풍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과 함께 시민 안전을 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부산대 연구팀 101층 엘시티 측정 #“하강하며 압력 가중, 저층 피해 커 #재난 예방할 제도적 장치 마련해야”

부산 해운대의 한 고층아파트 36층에 거주하는 박모(39)씨는 8일 “마이삭이 부산을 관통하던 3일 새벽 지진이 난 것 아니냐 싶을 정도의 흔들림에 시달려야 했다”며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파트 화단에 있던 금강송이 죄다 뽑혀 난장판이었고, 1~10층 저층부에는 외벽 유리창이 깨진 곳도 상당히 많았다”고 말했다.

빌딩풍은 바람이 도시 고층 건물 사이를 지나면서 서로 부딪쳐 기존 속도의 2배에 이를 정도의 강한 돌풍으로 변하는 현상이다. 특히 하강하는 빌딩풍은 중력이 더해지면서 압력이 가중된다. 아파트 저층부에서 빌딩풍 피해가 더 큰 이유다.

정부 주관 빌딩풍 연구를 진행 중인 부산대학교 학술용역팀의 지난 3일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최고층 아파트인 101층짜리 엘시티 건물 뒤편에는 건물 앞쪽과 비교해 50% 더 강한 풍속의 바람이 불었다. 건물 일대 평균 풍속이 초속 40m일 때 엘시티 주변 특정 지점의 풍속은 초속 60m에 달했다.

하이선이 들이닥친 지난 7일에는 빌딩풍을 측정하다가 포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빌딩풍 연구 용역단장인 권순철 부산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는 “7일 오전 8시 해운대구 마린시티에서 초속 50m가 넘는 강풍을 측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엘시티 주변은 초속 60m를 넘어서는 바람에 더이상 측정이 불가능했다”며 “같은 시각 해상 측정값이 초속 23m였던 것과 비교하면 빌딩풍 때문에 바람이 2배 이상 강해진다는 게 확인된 셈”이라고 말했다.

빌딩풍의 위험성은 이번 태풍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3일에는 엘시티와 시그니엘 부산 호텔 일부 외벽 타일과 시설 구조물 등이 뜯겨 나갔고, 광안리 해수욕장 앞에 있는 수영강변 아파트에서도 외부 유리가 파손됐다. 7일에는 엘시티 앞 신호등의 강철 기둥이 끊어지면서 횡단보도 위로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고층 건물에서 깨진 유리 파편이 빌딩풍을 타고 날아다닐 경우 보행자 등의 2차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5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의 경우 고강도 지진에 대비해 내진 설계를 하도록 돼 있을 뿐 바람 대비책은 없는 실정이다. 권 교수는 “현행 건축법상 빌딩풍은 재해환경영향평가 대상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빌딩풍 피해를 예방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해외에서도 빌딩풍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 영국 런던시는 초속 8m 이상 빌딩풍 방지 대책을 수립했고, 일본에서는 도심 고층 건물 설계 시 빌딩풍으로부터 보행자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권 교수는 “지금 당장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초고층 빌딩 주위로 방풍림을 조성하고 방풍 펜스를 설치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각종 소음과 미관상 문제 때문에 근본적 대안은 될 수 없는 만큼, 빌딩풍을 고려한 기술적 설계 기준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하태경 국민의힘 부산시당위원장은 ▶건축 허가 시 빌딩풍의 환경영향평가 기준 포함 ▶방풍 시설 등 빌딩풍 고려 설계 의무화 ▶빌딩풍 예보·경보시스템 구축 등 방안의 입법화를 제안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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