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청와대의 한 핵심 참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사퇴에 따른 청와대 차원의 대응 방안에 대해 보고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문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 아베 총리 사퇴에 대한 입장은 외교부를 통해서만 발표한다는 입장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청와대발 별도 입장을 내지 말자는 방안이었다. 경색된 한ㆍ일 관계 등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미 외교부를 통해 “급작스러운 사임 발표를 아쉽게 생각하며, 아베 총리의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 정부는 새로 선출될 일본 총리 및 새 내각과도 한ㆍ일간 우호 협력관계 증진을 위해 계속해서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문까지 만들어진 뒤였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이같은 참모진의 의견을 거부했다고 한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3일 “문 대통령이 오히려 한ㆍ일 관계의 조속한 회복을 위해 청와대가 직접 아베 총리의 사의 표명에 대한 입장을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결국 청와대는 이날 강민석 대변인 명의의 서면 브리핑에서 “오랫동안 한ㆍ일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 온 아베 총리의 급작스러운 사임 발표를 아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는 새로 선출될 일본 총리 및 새 내각과도 한ㆍ일 간 우호 협력 관계 증진을 위해 계속해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다만 200자 원고지 1장이 채 안 되는 짧은 입장문에는 문장의 주어가 없었다.
입장문 제목은 ‘아베 총리의 사임 의사 공식 표명에 대한 청와대 입장’이었다. 정작 내용에서는 “일본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로서 여러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고…”로 시작해 “사임 발표를 아쉽게 생각한다”로 끝마친다. 아쉽게 생각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모호한, 일종의 비문(非文)이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명기하기 다소 거북하니, 일부러 주체를 모호하게 한 거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한 전직 외교관은 “청와대 입장문의 주어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이지 않나. 크게 상관이 없다"라며 “일본의 차기 정부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대목 등은 외교적 주도권 면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여권의 한 인사도 "문 대통령이 아베 사임과 관련해 청와대 입장을 내라고 직접 지시한 것은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통 큰 결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임 의사를 밝힌 아베 총리는 세계 주요국 정상들과 전화와 트위터 등을 통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과는 전화통화를 했고, 20여 개국 정상에게는 트위터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인사 대상에는 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빠졌다.
한편 청와대는 이날 “서훈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개최하고 한·미 동맹 및 한·일 관계와 관련한 주요 현안을 점검하고, 아베 총리 사퇴 이후 후임 총리와의 한·일 현안 협상 노력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상임위원들은 이 자리에서 일본의 정국이 안정되는 대로 교착 상태에 있는 한·일 간 현안 협상이 진전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