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머나먼 남태평양, 그 길엔 꿈에만 뵙던 청년 아버지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청년들이 780만명. 조국을 떠나 해외로 끌려간 이도 104만명이 넘는다.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희생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들의 넋이라도 만나기 위해 아들ㆍ딸들이 추도 순례길에 나섰다. 2015년 12월 마셜제도 마주로 해변에서 이들이 아버지를 위해 바친 국화꽃. 떠나온 바닷가 발자욱마다 눈물이 묻어난다.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청년들이 780만명. 조국을 떠나 해외로 끌려간 이도 104만명이 넘는다.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희생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들의 넋이라도 만나기 위해 아들ㆍ딸들이 추도 순례길에 나섰다. 2015년 12월 마셜제도 마주로 해변에서 이들이 아버지를 위해 바친 국화꽃. 떠나온 바닷가 발자욱마다 눈물이 묻어난다.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광복 75주년 한수산의 기록-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 ③

아내와 노부모 두고 끌려갈 때 #배 속에 있던, 핏덩이였던 아들딸 #15년간 500여 명 통곡의 땅으로 #팔라우·안핑·윈난성·오키나와 … #마셜제도 밀리섬엔 인육의 야만 #‘기억하라, 용서는 그 후에’ 외침만

※편집자의 말

“저쪽이 조선이다.”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는 일본에 끌려간 징용공의 이 말로 시작한다. 중앙일보 광복 75주년 기획 '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은 징용공이 그토록 그리워 했던 ‘저쪽 조선’에 남았던 아들딸들의 이야기다.

그의 소설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군함도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들은 징용공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27년간의 조사와 고증 끝에 군함도로 끌려간 아버지들의 사투를 소설로 완성한 한수산 작가가 이제 남겨졌던 강제 동원 피해자 아들딸들의 생존기를 중앙일보에 기록한다.

희생자 유가족 해외추도순례 

2016년 물길이 고국으로 이어지는 마닐라 베이에서 희생자들에 헌화하는 필리핀 순례단.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2016년 물길이 고국으로 이어지는 마닐라 베이에서 희생자들에 헌화하는 필리핀 순례단.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과 딸들이 이제 백발을 흩날리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통곡의 땅을 찾아간다. 2006년부터 시작된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해외 추도순례’다. 국외의 희생 지역을 찾아가 그 넋을 달래고 정부 차원의 위로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주관으로 시작된 추도순례는 2014년까지 19회에 걸쳐 358명이 참가했다.

"유복자가 이제 당신보다 갑절 많은 나이"

2019년 9월 팔라우를 찾은 유족 박영만씨의 추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운 아버님. 유복자였던 제가 이제는 당신보다 갑절이나 많은 나이로 찾아와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움으로 눈시울이 젖어들어 가지만 드디어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합니다.”

위령제를 지내며 딸들이 전하는 어머니의 소식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여성의 삶이 화석처럼 담겨 있다.

“스물두 살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의 배 속에 자식을 남겨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는지요. ‘아들이 아니고 딸이더라도 잘 키워주기 바란다’고 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잊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할아버지·할머니 모시고… 구부러진 허리, 힘없는 다리로 86세인 지금까지 살아계십니다. 어머니는 광산김씨 문중에서 효열상까지 받으셨습니다.”

2008년 3월 대만 남쪽 안핑해역 순례에서 고(故) 김용주씨의 딸 김화숙씨가 올리는 비원(悲願)의 추도사다.

"전사소식 듣고도 사망신고 말라던 어머니는…"

2009년 4월 인도네시아 팔렘방 수라비아에서 고(故) 이성룡씨의 딸 이천세자씨나, 2006년 12월 세부섬 앞바다에서 정부미자씨가 올린 추도사 또한 그 시대 여성사의 한스러움을 서글프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둘째 딸이 이제야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내를 잃은 지 사흘 만에, 젖도 떼지 않은 어린 저와 노부모를 남겨두고 이국땅으로 끌려오신 아버지. 제 나이 열두 살이 돼 함께 징용에 끌려가셨다는 분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려고 할머니와 30리 길을 걸어 만나러 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붙안고 ‘네가 성용이 딸이냐.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하시며 우셨습니다.”

“저를 낳아놓고 백일도 되기 전에 우리 모녀 곁을 떠나신 아버지. 그렇게 예뻐하던 딸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 당신의 원혼 앞에 이렇게 왔습니다. 전사 소식을 듣고도 호적이나마 곁에 두고 싶다며 사망신고를 못하게 하시던 어머니. 모시고 왔으면 좋았을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난해 팔라우에 있는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추념공원을 찾은 유족들.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지난해 팔라우에 있는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추념공원을 찾은 유족들.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어린 딸을 껴안고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을 나직나직 부르곤 하던 엄마가 75세로 하늘나라에 갔다고 허공을 향해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는 딸도 있었다. ‘신발 신고 나갔으니 신발 신고 돌아오시겠지’ 기다림에 눈물 글썽이던 엄마의 이야기를 바닷물에 쓸려 보내는 딸도 있었다. ‘애비 언제 오나 머리 긁어 봐라’ 그때마다 앞머리를 긁으면 ‘아이구 내 새끼야, 애비가 금방 올라나 부다’ 활짝 웃으며 좋아하던 할머니도 있었다.
2007년 사할린으로 추도순례를 떠난 이재순씨가 탄광에서 행방불명돼 생사를 모르는 아버지를 그리며 올린 추도사는 시대에 짓밟힌 여성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어도 좋으리라.

"어머님은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올해 90세가 되셨습니다. 아버님이 가실 때가 25세, 어머니는 23세. 어머님은 몸이 불편해 지금도 병원에 입원하고 계십니다. 혹여 아버님께서 먼저 저세상에 가셨으면 어머님께서 가실 때 외롭지 않게 마중 나오시고, 이 세상에서 못다 한 부부 인연을 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죽어서도 못 돌아오는 뉴기니" 전쟁 참상  

2015년부터 사업을 이어받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은 8회에 걸쳐 159명의 유족을 모시며 파푸아뉴기니, 마셜제도 등 태평양에서 일본의 오키나와, 홋카이도와 중국 윈난성 등지로 순례지를 넓혔다.

‘자바(인도네시아의 섬)는 천국, 미얀마는 지옥, 죽어서도 못 돌아오는 뉴기니.' 패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이 참담했던 전시 상황을 회상하는 말이다. 기아의 극한에 내몰린 일본군이 저지른 참혹한 인육(人肉) 사건이 이때 벌어진다.

2007년 8월 마셜제도 추도순례단의 목적지는 수도 마주로였다. 괌까지 비행기로 5시간, 거기서 다시 9시간을 가야 하는 먼 곳이었다. 밀리 환초(Mili Atoll)를 바라보는 마주로 해변에서 유가족들이 올린 위령제는 어느 곳보다 침통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없었던 극한의 땅에서 유족들은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이었으리라. 고(故) 정성규씨의 아드님 정진영씨가 올린 추도사의 비통은 절규에 가깝다.

“오호! 슬프도다. 슬프도다. 밀리섬까지 끌려오셔서 갖은 고통과 풍상을 겪으시다가 참혹하게 돌아가신 선친의 영혼들이시어! 얼마나 많은 한을 품고 돌아가셨습니까? 3개월 동안이나 뱀, 개구리, 물고기로 연명하며 굶주림에 시달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까? 그러던 중 선친들이 한 두 사람씩 행방불명돼 수색해 본 결과, 일본놈들이 선친들의 살을 도려내 음식 대신 인육으로 대용하고 있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우리 선친들은 이 잔인무도한 일본놈들의 야만적 행동을 응징하려고 계획했으나, 정보가 사전 누설돼 1945년 3월 17일께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원한을 품고 애통하게 돌아가셨습니다.”

2015년 12월 마셜제도 마주로 해변에서 열린 위령제에 참여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김옥진씨가 바다를 향해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셜제도 밀리섬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저지른 인육 사건의 처참한 피해자였다. 진상을 알게 된 조선인들은 집단 봉기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돼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2015년 12월 마셜제도 마주로 해변에서 열린 위령제에 참여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김옥진씨가 바다를 향해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셜제도 밀리섬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저지른 인육 사건의 처참한 피해자였다. 진상을 알게 된 조선인들은 집단 봉기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돼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1156개의 섬으로 이뤄진 이 나라에서 우리 청년들이 맞아야 했던 참혹한 죽음. 정성규씨는 일제에 의해 강제 연행돼 해군 제4시설부에서 복무 중 밀리섬에서 사망했다.

66세에 강원도 철원에서 순례길에 올랐던 아들 정진영씨도 3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가까웠던 분들은 입을 모아 그는 정의감이 넘치고 직선적이었으며 ‘아주 쎈 사람이었다’고 했다. 정진영씨가 밀리섬에서 아버지가 겪은 만행을 영화로 만들고자 고심하며 만년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선친의 원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강제동원된 조선 청년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며, 아버지였음을 알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마셜제도 밀리섬엔 일본군 인육의 야만

일본에서는 굶주림의 극한에 내몰린 그곳 패잔병의 참상을 다룬 소설 『노비(野火)』가 충격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1959년 이 소설을 영화화한 감독마저 ‘영양실조로 이가 상해 먹을 수가 없었다’고 사건의 진실에서 눈을 돌렸다.

‘극한의 기아 속에서 전우를 죽여 그 살을 먹어야 했던 밀리섬의 지옥을 어찌 잊겠는가.’ NHK의 '전쟁 증언 아카이브스'가 담고 있는 병사들의 증언이다. 우리 강제동원 청년들의 주검도 여기에 묻힌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 야욕이 닿는 거의 모든 곳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자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조선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 야욕이 닿는 거의 모든 곳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자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국제법상 병원선임을 알리는 하얀 선체에 녹색 띠를 두르고 부상병을 실어나른 화물여객선이 히카와마루(氷川丸)다. 1941년 일본 해군에 징발된 이 배는 45년 9월 29일 최초로 ‘해골이 훈도시(일본 전통 팬티) 하나만 걸친 것 같았다’는 2590명의 패잔병을 싣고 일본으로 향했다.

세월이 흘렀다. 늙어버린 히카와마루는 현재 유스호스텔로 요코하마 해상공원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기아에 내몰렸던 패잔병들을 실어나른 어두운 과거와 수학여행 온 청소년들이 싱싱하게 뛰놀다 잠드는 이 배의 현재가 한낱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기억하라 용서는 그 후에" 아들의 절규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고 누가 말하는가. 청산 없이 흘러간 75년의 한·일 과거사를 향한 정진영씨의 절규가 여기에 있다. 기억하자는 그의 외침은 그만의 통곡일 뿐인가. 그의 목소리가 화살이 돼 날아온다. ‘기억하라. 용서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그분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나의 뜻도 여기에 있다.

2016년 10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추모제.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2016년 10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추모제. [사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멀고 힘든 길이었다 해도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성취와 치유, 고요함이 남는다. 과거사를 향한 해원(解寃)의 마음을 담아 떠났던 발길들. 아버지가 돌아가신 자리에 서며 쏟아져 나온 것은 통곡일 수밖에 없었지만, 찾아간 그곳에는 한 번도 소리 내어 불러보지 못한 청년 아버지가 있었다.

‘제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원망을 넘어 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짧은 시간, 고난을 헤치고 나와 만나는 아름다운 치유가 순례의 귀로에도 발자국마다 남았다. 그랬기에 1943년 남양제도 마킨섬에서 숨진 고(故) 김동완씨의 장남 김기환씨는 감사의 인사부터 전하지 않았던가.

“아버지. 저와 여동생 유순이, 유복자 영환이 저희 3남매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