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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경제참모 열전①] 화웨이 잡는 ‘트럼프 화살’ 로스, 외환위기땐 韓 저승사자였다

중앙일보

입력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파고에 몸부림치던 1998년 3월 26일. 서울 한라그룹 본사에 한 미국인이 나타나 정몽원 당시 그룹 회장과 악수를 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그가 내민 건 10억 달러 대출 계약서. 나라의 외화 곳간이 텅 비어 1달러라도 급했던 기업과 정부는 계약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서를 서명하던 날 사진 속 정 회장의 표정은 떨떠름하다.

정몽원 한라그룹회장과 윌버 로스 로스차일드사장이 3월 26일 한라그룹 본사에서 10억달러 브리지론 제공협약서를 교환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몽원 한라그룹회장과 윌버 로스 로스차일드사장이 3월 26일 한라그룹 본사에서 10억달러 브리지론 제공협약서를 교환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리고 사진 속의 또 다른 미국인, 그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브레인 중 한 명이자, 상무장관인 윌버 로스(82)다.

그는 IMF 위기 당시 국제 금융계에서 친한파를 자처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 과정에 한국 정부와 많은 기업이 그의 조언을 들었다. 세계적인 은둔형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의 회장이었던 그는 2000년 아예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따로 차려 한국에 집중했다. 2000년 1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 위기 극복 공식 선언식에서 그에게 표창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로스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철저히 이윤을 좇아 움직이는 금융인이다. 한국의 IMF 위기는 그에겐 황금의 기회였다. 그는 막대한 수수료를 대가로 챙겼다. 한국 정부가 리먼브러더스에 자문을 구하려고 하자 “뭐하러 비싼 돈을 주고 외국 자문사를 데려오느냐”며 “내가 다 해주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기획재정부 등에서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뉴욕타임스(NYT)의 2006년 서울발 기사엔 로스에 대한 한국 정부와 재계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엿보인다. NYT 기사엔 “김대중 대통령에게 로스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지만, 사실 그는 경제위기로 취약해진 기업들을 통해 과도한 이윤을 남긴 사기꾼이라는 평판도 남겼다”는 인용문도 있다. 이 코멘트를 한 이는 현재 청와대 정책실장인 김상조 당시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다.

실제로 로스를 구글링하면 국제금융계에서의 그의 별명인 ‘파산의 왕’ ‘기업 사냥꾼’ 등이 검색된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에 나선 윌버 로스(맨 왼쪽) 상무장관. 맨 오른쪽은 윌리엄 바 법무장관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에 나선 윌버 로스(맨 왼쪽) 상무장관. 맨 오른쪽은 윌리엄 바 법무장관이다. 로이터=연합뉴스

화웨이에 화살을 날리다  

지금 로스가 사냥에 나서 정조준하고 있는 목표물은 중국이다. 미ㆍ중 무역 갈등이 점화되기 전부터 대중(對中) 강경 발언을 일삼아왔지만, 최근엔 더 정교하게 화살을 날리고 있다. 대표적인 게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華爲)다.

로스의 지휘 아래 미국 상무부는 지난 17일(현지시간) 화웨이 제재 강화 방침을 발표했다. 미국이 아닌 제3국을 통해 부품을 사고팔 수 있는 우회로까지 차단한 초강경 조치다.

로스 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화웨이와 그 계열사들은 제3자를 통해 미국의 기술을 이용했고, 그 결과 미국의 국가 안보와 외교를 훼손했다”며 “우리의 다면적 조치는 화웨이의 그런 행태가 지속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밝혔다.

포브스는 22일 “로스 장관이 화웨이와의 싸움에서 매복 공격에 돌입했다”며 “그의 출현으로 미국의 화웨이에 대한 공격 강도는 더 강해졌다”고 전했다.

화웨이 로고. 로스 상무장관의 초강경 조치로 제재 사면초가 처지가 됐다. AFP=연합뉴스

화웨이 로고. 로스 상무장관의 초강경 조치로 제재 사면초가 처지가 됐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로스에 ‘은혜 입은 까치’

로스는 트럼프 대통령 내각의 원년 멤버다. 4년 가까이 상무부 장관이란 중책을 맡아오고 있다. 지난 7월 잠시 입원했으나 건강엔 큰 이상이 없다는 게 상무부의 공식 입장이다. 지난해 미ㆍ중 무역 협상 부진과 이민자 인구조사 정책 실패 등으로 트럼프가 경질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는 나왔지만, 약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건재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트윗 해고를 일삼는 트럼프 곁에서 직을 오래 고수하는 건 로스의 처세술 덕이란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전 카지노 리조트 파산 신청 건을 다루며 구제를 해줬던 게 인연이 됐다. 원래 민주당 지지자였지만 트럼프가 상무장관직을 제안하자 바로 공화당으로 돌변했다.

지난 5월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의 '결단의 책상'에 앉은 트럼프 대통령과 뒤에 선 로스. AP=연합뉴스

지난 5월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의 '결단의 책상'에 앉은 트럼프 대통령과 뒤에 선 로스. AP=연합뉴스

로스차일드에서 24년간 CEO 재직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로스의 재산은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2017년 포브스는 그의 재산이 25억 달러(약 2조9737억원)라고 보도했다. 자산가들이 많은 트럼프 행정부 안에서도 최대 규모였다. 이후 로스 측은 “실제론 7억 달러밖에 없다”고 정정을 요구했으나, 미국 언론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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