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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살려달라는데 규제법 더 옥죈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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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경제에 ‘비상등’이 켜진 가운데 정부가 기업 규제에 방점을 찍은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25일 국무회의를 열고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을 의결했다. 해당 법안은 이달 말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그동안 재계가 법안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거듭 밝혔지만 정부는 이런 의견을 무시하고 원안 그대로를 밀어붙이고 있다. 재계는 다음 달 열리는 정기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한 여당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처리할까 우려하고 있다.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재직하던 2018년부터 ‘재벌개혁’ 수단으로 추진해 왔다.

상법·공정거래법 국무회의 의결 #공정위의 고발 없이 검찰 수사 등 #‘대기업 개혁’ 명목, 논란 많은 법안 #전문가 “고용 늘릴 돈, 규제 탓 허비”

이번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다중대표소송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안 도입이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에 손해를 끼친 임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상장회사의 경우 지분율이 0.01%에 불과한 소액주주(보유기간 6개월 이상)도 해당 기업의 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소액주주 입장에선 승소해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없기 때문에 변호사 선임 비용을 써가며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며 “자금력 있는 헤지펀드가 기업에 특혜를 요구하기 위한 ‘위협 소송’ 수단으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상법 개정안에 담긴 감사위원 분리 선출에 대해선 헌법에 어긋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산권의 일종인 대주주의 주주총회 의결권을 강제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현행 상법은 주주들이 주총에서 선임한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을 뽑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뜻대로 상법이 개정되면 대형 상장사들은 주총에서 별도로 감사위원을 선출해야 한다. 이때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는 아무리 많은 주식을 갖고 있어도 최대 3%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주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소액주주들이 원하는 사람을 감사위원으로 선출하자는 취지인데, 해외 투기성 자본의 공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에도 재계가 ‘독소조항’이라고 주장한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주회사의 지분율 요건을 강화한 조항이 대표적이다. 현재 지주회사는 상장사 지분 20%, 비상장사 지분 40%를 확보하면 자회사나 손자회사로 편입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이 개정되면 상장사는 30%, 비상장사는 50%의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기업들이 지분을 추가로 취득해야 하는 만큼 비용 부담은 커지지만 규제 강화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호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34개 기업집단 중 지주회사를 도입하지 않은 16개 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다면 30조9000억원을 자회사 지분 확보에 써야 한다.

정부, 재계의 “투자·경영 위축” 의견 거듭 묵살…원안대로 이달말 국회 제출

정부는 지주회사 전환을 권장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기업들의 지주회사 전환을 주저하게 하는 규제를 도입하는 셈이다.

이준길 법무법인 지평 고문은 “이미 같은 기업집단 안에서 지배관계에 있는 회사의 지분을 더 사라고 하는 것은 실익 없이 비용 부담만 늘릴 뿐”이라며 “일자리를 늘리고 기술개발 투자에 써야 할 돈을 규제 비용으로 허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 중 기업끼리 교환할 수 있는 정보의 유형을 정부가 정해 주는 조항도 재계에선 ‘독소조항’이라고 반발한다. 정부는 담합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하지만 기업 간 자유로운 소통을 통한 시너지 (상승효과)까지 차단할 수 있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이 고문은 “기업들은 문제 소지를 없애기 위해 아예 정보 교환 자체를 하지 않게 되고 시장 내 정보의 비대칭성을 더욱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해외에선 기업 간 정보교환 행위가 담합으로 연결될 때에만 처벌한다”고 말했다.

가격담합 등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는 조항도 기업에는 부담이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공정위의 고발이 없어도 검찰이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선 공정위 조사와 검찰 수사를 동시에 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대 명예교수는 “기업이 법 개정안을 자발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일정한 적응 기간을 주는 방법도 (정부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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