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청구서' 들고오는 양제츠, 서울 아닌 부산서 노린 것

중앙일보

입력 2020.08.21 05:00

21일 부산을 방문하는 양제츠 중국 중앙정치국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 [중국 바이두 캡처]

21일 부산을 방문하는 양제츠 중국 중앙정치국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양제츠(杨洁篪) 중국 중앙정치국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이 오는 21일 1박 2일 일정으로 방한하면서 서울이 아닌 부산을 택했다.

19~20일 싱가포르 방문 이어 부산행
시진핑 방한 위한 ‘청구서’ 들이밀 가능성

외교부 등에 따르면, 양 위원은 21일 국제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해 22일 오전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만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싱하이밍 대사를 포함해 주한 중국대사관 직원들과 외교부 실무자들은 20일 부산으로 내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확산 이후 첫 중국 고위인사의 방한 행사 준비에 돌입했다.

◇서울 아닌 부산 택한 이유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2018년 3월 청와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방한한 양제츠 정치국 위원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2018년 3월 청와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방한한 양제츠 정치국 위원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양제츠 정치국원이 부산으로 오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연내 방한 성사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한국 정상을 만나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그만큼 시 주석의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해 양국 간 조율해야 할 현안이 많다는 뜻이다. 신종 코로나 상황에서 시 주석의 방한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양국이 각각 서로에게 안겨줄 ‘선물’이 무엇인지 담판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지난 18일 “중국 측의 일정 및 희망 사항 등을 고려해 양국 협의를 통해 부산 개최로 결정됐다”며 “최근 국내 코로나19 확산 문제와 이번 회담 장소 결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김흥규 아주대 중국정책연구소장은 "양국 간 조심스러운 사안이 많고 충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산에서 볼 수 있다"며 "최대한 관심을 덜 받는 방식으로 회동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문흥호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양 위원이 일본 등 다른 국가를 추가 방문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의 목적지로 서울이 아닌 부산을 택했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문 대통령과의 접견을 피함으로써 한·중 양국이 각각 미국과 북한을 굳이 자극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함의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이 받아들 중국의 ‘청구서’는  

한국과 중국 양쪽이 밝힌 이번 방한의 이유도 신종 코로나로 연기돼 온 시 주석 방한을 위한 의제 조율이다. 즉 격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갈등 속에서 한국이 중국의 요구사항을 얼마나 들어줄 수 있는지에 따라 시 주석 방한이 결정된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왼쪽)가 19일 서울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해 아들 노재헌씨와 환담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왼쪽)가 19일 서울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해 아들 노재헌씨와 환담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싱하이밍 중국대사도 지난 19일 노태우 전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한·중 수교의 의미를 언급하면서 “양제츠 국무위원의 이번 방한은 아주 중요한 방문”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미·중 갈등 속 한·중 관계가 중요한 분기점을 맞고 있다는 긴박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양 위원은 방한 전인 19~20일 싱가포르를 방문해 우호 관계를 다지는 작업을 한다. 이에 따라 양 위원은 한국에도 미ㆍ중 갈등 국면에서 중국에 힘을 실어줄 거나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 줄 것을 기대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반(反)중국 경제 네트워크인 ‘경제협력네트워크(EPN)’와 화웨이 제재 등 ‘반중(反中) 블록’ 참여를 동맹국에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적극적인 합류를 막으려는 것이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또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한국 불배치 요구를 비롯해 홍콩ㆍ대만 문제에 대해 중국의 입장에 공감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다양한 정상회담 ‘청구서’를 내밀 것으로 내다봤다.

◇한·미 연합훈련 기간에 이례적 방한하는 양제츠 

한미연합훈련의 사전 연습 성격인 위기관리참모훈련이 시작된 11일 오후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헬기들이 계류돼 있다. [뉴스1]

한미연합훈련의 사전 연습 성격인 위기관리참모훈련이 시작된 11일 오후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헬기들이 계류돼 있다. [뉴스1]

특히 시 주석의 특사격인 양 위원의 방한 시기와 한·미연합훈련(18~28일) 기간이 겹치는 점도 미묘하다. 그만큼 중국 측도 급한 구석이 있다는 얘기다.

미국도 당연히 방한한 양 위원이 어떤 논의를 이어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은 지난 17일 B-1B 전략폭격기 4대와 B-2 스피릿 스텔스 폭격기 22대 등 6대의 폭격기를 대한해협과 일본 인근 상공에 띄웠고 이틀 후인 19일 러시아는 전략폭격기 Tu-95MS 2대 등 모두 6대를 독도 동해상 인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시켰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러시아도 개입하는 양상이다.

이와 관련, 미 공군의 전략적 억지 및 핵 통합 담당 부참모장인 리처드 클라크 중장은 지난 19일(현지시간) 한 포럼에서 최근 미 폭격기 출격을 놓고 "우리 동맹국들에 대한 보장 조치로서 존재하는 유연하고 가시적인 전력이라는 점을 확실히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행위"라고 밝혔다. 미국의 '동맹 보장' 언급은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한국을 향한 메시지로도 해석할 수 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한·미 및 미·일 연합훈련이 진행되고, 이에 대응해 러시아의 전략폭격기가 독도 인근 한국방공식별구역에 나타나는 상황에서 서훈과 양제츠의 만남은 동북아 정세에 큰 함의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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