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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벽 설치, 무임승차 늘 것"…폭행·성추행 떠는 女택시기사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 3일 오전 경북 구미 진평동. 여성 택시기사 A씨(57)는 20대 남성 승객에게 흉기로 복부를 찔렸다. 다른 흉기로 머리도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택시 문을 세게 닫았다고 A씨가 언성을 높여 홧김에 찔렀다”고 진술했다.

#2. 지난 5월 인천 서구 청라동. 술 취한 남성 승객이 여성 택시기사 B씨(59)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빨리 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B씨의 마스크를 벗게 하고선 되려 “마스크를 쓰라”며 B씨의 얼굴을 때렸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상체를 운전석으로 기울이더니 성추행까지 시도했다.

지난 5월 23일 오후 인천 서구에서 만취 상태로 택시에 탑승한 B씨(57)가 여성 기사를 폭행하는 장면이 블랙박스에 찍혔다. [피해자 측 제공]

지난 5월 23일 오후 인천 서구에서 만취 상태로 택시에 탑승한 B씨(57)가 여성 기사를 폭행하는 장면이 블랙박스에 찍혔다. [피해자 측 제공]

여성 택시기사 더 괴로운 '무임승차' 

전체 택시기사 중 여성은 1% 수준이다. 소수 여성 택시기사를 상대로 한 범죄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15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응한 서울·경기 지역 여성 택시기사들은 “택시기사에 대한 인식이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며 “특히 여성을 우습게 보는 승객이 간혹 있어 불안감 속에서 일한다”고 입을 모았다.

53년 동안 택시 운전을 한 김재옥(78)씨는 “무임승차는 남성 택시기사도 겪는 일이지만, 여성 택시기사가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는다”며 “적어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승객이 있다”고 말했다. 70년대부터 택시 운전을 한 김씨는 90년대 들어 무임승차·폭행 등 만취 승객으로 인한 사고가 늘었다고도 했다.

무임승차가 가장 큰 고민이다. 주로 신체 조건이 좋은 남성이 무임승차를 한다. 여성이라 더 잡기 어렵다. 서울에서 택시를 몰고 있는 신모(46)씨는 “무임승차가 반복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쫓아가서 붙잡으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다”며 “경찰에 신고해도 잡는다는 보장이 없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요금 2만원을 내지 않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승객에게 소송을 걸려다가 포기했다.

[연합뉴스TV]

[연합뉴스TV]

성추행 당해도 끙끙 

욕설은 물론 폭행·성희롱을 경험한 여성 기사도 많다. 경기도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김모(59)씨는 2년 전부터 야간 운행을 하지 않는다. 만취 승객으로부터 폭언·폭행을 당하는 일이 잦아 늦은 시간에는 운전하지 않게 됐다. 이어 “언어 폭행이 가장 많다”며 “특히 어르신이 여성 기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방향 좌우 지시할 테니까 가기만 해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몇 년 전 야간 운행을 하던 중 술에 취해 탑승한 노인에게 머리와 얼굴을 맞았다. 그는 “정말 안 잊힌다”며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한참 동안 승객이 탈 때마다 신경 쓰였다. 특히 폭행한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 승객은 정말 태우기 어렵더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 기사는 “최근 조수석에 탄 남성 승객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수치스러운데 가족이 알면 걱정만 할 것 같아 혼자 앓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조수석 탑승금지' 현실적" 

택시기사에 대한 보호 수단으로 격벽(隔壁·칸막이벽)을 설치하자는 주장도 있다. 현실에선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여성기사가 많았다. 인터뷰에 응한 5명의 기사는 모두 “격벽이 완벽한 방어수단인지 의문이고, 무임승차 문제는 오히려 커질 것 같다”며 “격벽을 보고 ‘나를 못 믿는 거냐’며 문을 두드리며 난동 피우는 승객도 많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조수석에 앉는 것을 삼갔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조수석이 운전석과 가까워 직접적인 신체접촉이 일어나기 쉬워서다. 김씨는 “앞자리에 최대한 못 타게 하려고 쇼핑백 등 짐을 놓고 운행을 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6월 강원 춘천시 운수종사자 휴게시설 앞에서 지역 택시 종사자 300여 명이 춘천에서 일어난 택시기사 폭행 사건 피의자에 대한 구속 수사와 엄벌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강원 춘천시 운수종사자 휴게시설 앞에서 지역 택시 종사자 300여 명이 춘천에서 일어난 택시기사 폭행 사건 피의자에 대한 구속 수사와 엄벌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택시·버스 기사 등 운전자 폭행 사건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2700건 안팎으로 발생하고 있다. 경찰은 피해자 상당수가 택시기사로 보고 있다. 운전자 폭행은 가중처벌 대상이다. 5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지만,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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