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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헤즈볼라 휘청…미국, 친이란 벨트 약화 눈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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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호 08면

[최익재의 글로벌 이슈 되짚기] 중동 정세 뒤흔든 베이루트 참사

지난 13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국회의원 차량을 공격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3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국회의원 차량을 공격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레바논 사태가 일파만파다. 레바논이 중동의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4일 베이루트항에서의 폭발 참사가 국내 정치는 물론 중동 정세까지 뒤집어놓고 있는 형국이다.

반정부 시위대 정치 개혁 요구 #이란은 시아파 벨트 약화 우려 #“일부 국가, 물고기 낚으려 한다” #서방, 기존 질서 현상 유지 속 #헤즈볼라 무장 해제 실리 노려 #이스라엘에 도발 땐 상황 악화

하산 디아브 내각은 지난 10일 총사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부 시위대는 10여 개 종파의 ‘나눠먹기식’ 권력 분점을 비난하며 전면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레바논에선 종파 간 세력균형을 위해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각각 맡고 있다.

이 같은 권력 분점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레바논에서는 갈등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안전핀이었다. 레바논이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 만든 국민협정에도 종파 안배 원칙이 있었고, 이슬람교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 내전이 종식될 때 맺은 타이프 협정(1989년)에서도 이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의 권력 독점 장치로 전락했다는 평가다.

지난해 10월 발생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는 경제난 등 실정에 대해 권력층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였다. 시위대는 종파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전문가 중용을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제는 더욱 악화됐고 여기에 대규모 폭발 사고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삼중고를 겪고 있는 시민들의 타깃은 무능한 정치권 전체다. 최근 시위대는 퇴진한 디아브 내각을 지원했던 시아파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의 초상화에 올가미를 걸었다. 미셸 아운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웠고 국회의장의 퇴진도 요구했다. 기존 정치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라는 요구였다.

가장 큰 도전을 받고 있는 정파는 2018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한 헤즈볼라와 그 동맹 세력이다. 레바논에서는 대통령보다 총리의 권한이 더욱 커서 헤즈볼라를 가장 강력한 집권 세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사태의 향방은 헤즈볼라의 운명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게 레바논 안팎의 평가다.

국제사회가 이번 레바논 사태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중동 시아파 맹주인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헤즈볼라의 세력이 약화될 경우 미국·프랑스 등 서방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핵 문제로 이란과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로서는 레바논 사태가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란이 주축이 된 시아파 벨트를 약화시킬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는 반서방 성향을 지닌 채 사우디아라비아가 좌장격인 이슬람 수니파와 역내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와 관련,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트럼프 정부에 몇 가지를 조언하고 있다. 첫째, 반헤즈볼라 세력을 대안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전면적인 정치 개혁이기 때문이다. 둘째, 폭발 사고에 따른 인도적 지원을 민간단체를 통해 해야 한다. 레바논 국민이 부패한 자국 정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이번 사고와 관련해 가장 강력한 집권 세력인 헤즈볼라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넷째, 반정부 시위대의 평화적인 집회를 보장하기 위해 레바논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 등이다.

1920~43년 레바논을 식민통치했던 프랑스의 대처도 발 빠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폭발 사고 직후인 지난 6일 레바논을 직접 방문했다. 양국 관계는 레바논 독립 이후에도 우호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프랑스는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양국 간 인적 교류도 활발해 이중 국적자도 수십만 명에 달한다.

이 같은 서방 측의 움직임에 대해 이란 외교부는 “레바논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일부 국가들이 물고기를 낚으려 한다”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자칫 헤즈볼라의 세력 약화로 시아파 벨트에 손상이 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중동 전문가들은 “현재까지 상황으로 볼 때 반정부 시위로 인해 레바논 정치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기존 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없고 기존 질서를 허물었을 때의 공백에 따른 혼란도 만만찮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방 국가들도 ‘현상 유지’를 통한 안정을 유지하면서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 등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에 힘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다. 헤즈볼라는 15년에 걸친 기독교 세력과의 내전이 끝난 1990년 이후에도 무장을 풀지 않고 있고, 서방 측은 이를 역내 평화의 위협 요소로 보고 있다.

이처럼 레바논 사태의 전개는 프랑스와 이란, 그리고 미국 등 강대국들의 3파전 속에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또 다른 돌발 변수도 있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헤즈볼라가 국내외적으로 치명적인 위기에 몰렸을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이스라엘에 대한 도발이다. 2006년에도 이스라엘과 한 달간 전쟁을 벌여 양측에서 1300여 명이 숨졌다. 자칫 전쟁이 재발할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레바논 폭발 참사가 중동이란 화약고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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