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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지적했는데 가족까지 혐한 낙인…일본상품 불매의 그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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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호 14면

지난 2월 아베규탄시민행동 회원들이 ‘친일파청산’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다. [뉴시스]

지난 2월 아베규탄시민행동 회원들이 ‘친일파청산’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다. [뉴시스]

“혐한 유튜버란 낙인도 모자라서 제 가족에게까지 혐한 엄마, 혐한 여동생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콘텐트는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위안부 문제나 한국 아이돌을 거론했다는 이유만으로 혐한 꼬리표가 계속 따라붙는 게 억울할 따름이다.”

발언 왜곡, 과도한 개인 혐오 변질 #친일·반일 맥락없는 사용이 문제 #증오 수단 사용 땐 운동 목적 훼손

일본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유튜버 NOBLEMAN(본명 이요셉·31)의 얘기다. 그는 일본 콘텐트 전문가로 약 36만 명의 일본인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혐한(한국 혐오) 유튜버, 극우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 이슈나 K팝 문화를 언급하면서 한국을 비하했다는 이유다. NOBLEMAN는 이 같은 사실에 완강히 부인한다. 그는 “위안부 합의금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한국 정책에 대한 지적이 한순간에 ‘위안부 비하 발언’으로 둔갑했고 이후 한국을 혐오했다는 각종 악플과 기사에 시달려야 했다”고 설명했다. 최근엔 대형 기획사의 한 아이돌 멤버가 그와 친분을 자랑하자 해당 아이돌 멤버에 대한 탈퇴 요구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법률대리인인 강상용 변호사(법무법인 YK)는 “국내 만연한 반일 분위기에 편승해 일부 발언을 왜곡하고 혐한으로 낙인찍는 마녀사냥을 더는 간과할 수 없어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일 관계 악화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여전히 진행중인 가운데 일부에서는 국민적 분노를 왜곡하는 혐오 프레임으로 변질되고 있다.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으면 친일로 규정하거나 한국에 대해 우호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혐한이라는 낙인을 찍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개그맨 유민상

개그맨 유민상

한국 유학생활 2년 차인 재일교포 2세 박모(22)씨는 얼마 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일본 제품을 인증했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다. 일본에 있는 부모가 보내준 각종 일본 간편식과 생활용품을 모아 찍은 사진과 함께 ‘고향에서 온 위로’란 글을 남겼다. 그러자 한국 친구들은 댓글을 통해 ‘한국제품으론 위로가 되지 않냐’, ‘국부유출은 친일’라고 반응했다. 박 씨는 “부모님이 현지 제품을 보내준 것뿐인데 마치 내가 일본제품 불매를 반대하는 거로 여기는 분위기였다”라며 “대학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들인데 괜한 감정싸움으로 번질까 게시물을 바로 삭제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개그맨 유민상 역시 SNS와 유튜브에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가 출시한 게임 ‘동물의 숲’을 인증했다가 일부 누리꾼에게 원색적 비난을 받고 사과한 바 있다.

일부 발언들이 왜곡돼 ‘토착왜구’ 비난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10년째 여성인권 시민단체 활동하고 있는 정모(38)씨는 사석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회계부정 논란에 대해 언급했다가 동료 활동가들에게 “토착왜구 아니냐”란 말을 들었다. 정 씨는 “원론적인 대화 내용이었음에도 ‘한일관계가 안 좋은 상황에서 정의연 흔들기는 토착왜구와 같은 행동’이란 지적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토착왜구는 친일부역자를 뜻하는 ‘토왜’에서 파생된 말로 최근 반일 분위기가 커지면서 온라인 커뮤니티 중심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친일·반일 프레임을 사용하는 행태부터 근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던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지금의 친일·반일 프레임은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나와 역사관이 다른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고 있다”며 “맥락 없는 사용을 방치한다면 정말 일본과 풀어야 할 문제를 국가 대 국가로서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친일이냐 반일이냐고 묻는 건 사실상 편 가르기식으로 결국 내편 네편으로 나눠 세력 다툼하겠단 뜻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회 캠페인과 개인에 대한 공격을 구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매운동을 하는 이유는 일본 정부에 대한 우리 국민의 항의란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개개인의 맹목적인 증오 수단으로 사용되면 당초 운동 목적이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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