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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사대부 고상한 취미…조선후기엔 내기바둑도 성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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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조선 시대 바둑은 ‘사서(史書)’라 부를만한 자료는 없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단편적으로 담겨있는 정도다. 국수들의 생몰 연대도 불확실하고 그 활동상도 대개 야담 같은 형식으로 전해진다. 여자 프로기사 김효정 3단이 쓴 석사 논문 ‘조선 후기 바둑취미 확산과 그 문학적 형상화’는 그래서 강렬하게 눈길을 끈다.

프로기사 김효정 연구논문 눈길 #옛 문헌·회화 통해 ‘통속화’ 추적

‘조선 전기는 왕과 귀족 사대부들이 고상하게 바둑을 즐겼다면 조선 후기는 바둑이 서민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풍속의 하나가 되었다.’ 요지는 이렇지만 이를 위해 제시한 수많은 문헌, 회화, 시 등이 조선 시대 바둑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운영(1722~1794)의 기장(棋場) 7편, 홍현보(1815~?)의 기보서(棋譜序) 등 의미 있는 바둑 문헌을 새로 발굴한 것, 각종 자료를 통해 국수들의 활동 시점을 비교, 추산하여 조선 국수 계보를 작성한 것도 뜻깊은 수확이다.

김효정(39)은 1996년 프로에 입문한 24년 차 프로기사다. 여자로는 처음 프로기사회장을 했고 현재는 바둑전문채널인 K바둑의 이사이자 해설자로 일한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성균관대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의욕적으로 대학원에 진입했으나 논문은 계속 미뤄졌다.

“힘에 부치지만 이 논문만은 꼭 완성하고 싶었다. 11년이 걸렸다.”

조선 전기 바둑은 은일, 초탈, 무욕의 탈속적 상징을 지니고 있었다. 바둑은 지극한 이치가 담긴 인생의 축소판으로 여겨져 용병, 치세 등 수많은 분야에서 인용됐다. 동시에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유희에 빠지면 뜻을 잃는다는 유학 쪽의 경계심도 강했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러 바둑이 크게 유행하면서 벽(癖)이 없고 취미에 몰두하지 못하는 사람을 ‘생기 없는 밥보따리’라 비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바둑만 잘 두어도 부와 명예를 얻게 되고 내기바둑이 성행하자 ‘생업을 팽개치고 가산을 탕진하여…’식의 강렬한 바둑비판론마저 제기됐다.

전기 바둑 회화는 ‘상산사호도’가 상징하듯 신선의 분위기였으나 후기엔 대장장이, 무당, 엿장수, 포목장수, 기생 등과 더불어 바둑 두는 모습이 담겨있다. 통도사 감로탱처럼 바둑을 두다가 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바둑판을 뒤엎어버리는 모습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바둑의 대중화, 통속화를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저자는 적고 있다. 조선 전기엔 바둑이 들어간 한시가 1200여수인데 후기엔 4270여수로 3배 이상 늘어난다.

김효정이 정리한 국수 계보 맨 위엔 서천령과 덕원령이 나온다. 둘 다 종실 사람이지만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조선 제일의 국수’로 불린 서천령은 명종 때, 각종 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설적 존재’ 덕원령은 선조 때 활약했다. 숙종 때 국수로 추대된 유찬홍(1628~1697)은 역관 출신. ‘국조제일수’로 불린 김종귀, 화가로 더 유명한 최북(1712~1786), ‘국기’로 평가받으며 명성이 덕원령을 능가했다는 정운창은 모두 18세기 중반에 활동했다. 그 뒤를 50년간 국기로 불린 김한흥이 잇는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이필, 가는 곳마다 공경대부들의 초청을 받았던 고동과 이학술, 근대 국수인 김만수에 이르기까지 20명의 국수 계보를 만들었다. 김효정은 난해한 한문이 가득한 수많은 고문서 번역에 대해 “박사 선배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끝으로 성종실록에 나오는 한 문장을 소개한다. ‘예부터 간사하고 아첨한 자의 해가 전대의 업적을 패망시킨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전철을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곁에서 바둑을 구경하는 자는 승패를 알 수 있으나 직접 두는 자는 막연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과 같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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