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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근간인 시장경제와 기업의 역할 더 가르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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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시장이 없는 시장경제 교육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는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초·중·고교의 경제교육, 특히 고등학교에서는 경제 주체의 합리적 선택과 시장의 한계를 강조한다.

대입 수능시험 경제과목 선택 2% #교과서 내용도 반시장적 서술 많아 #정부 시장 개입 부작용 늘어나지만 #시장 실패 부각해 현실을 왜곡시켜

이런 경향은 교과서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나타났다. 모두 5종의 통합사회 교과서에서 시장경제 관련 내용의 분량 구성비는 ‘시장의 의미’ 13.4%, ‘시장의 한계’ 15.3%,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정부의 역할’ 14.1% 등이 주를 이뤘다. 정부 실패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반면에 선택과목인 경제 교과서(천재교육 발간)의 분량 구성은 ‘시장의 의미’ 63.2%, ‘시장의 한계’ 5.3%, ‘정부의 역할’ 11.8%, ‘정부의  한계’ 1.3%로 돼 있다. 그러나 이 심화 과정의 경제 교과는 학생들이 거의 선택하지 않는 데다 학교에서 제한적으로 개설돼 배울 기회도 없다.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에서 경제 과목 선택비율은 2% 내외에서 그친다.

고등학교 통합사회 교과서가 큰 정부에 경도돼 있다는 것은 한국교육방송(EBS)이 2020년 발간한 ‘새 교과서 반영 고등 예비과정 통합사회’ 교재에서도 드러난다. EBS 교재의 ‘시장경제와 금융’ 단원은 “시장경제란 무엇이며, 왜 시장경제에 정부가 개입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SSM(기업형수퍼마켓) 꼼수로 골목 차지’ ‘대형 유통업체 막아 달라 - 슈퍼마켓 연합 규탄 성명’이라는 제하의 2017년 신문기사를 교과서 한 페이지의 절반에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보면 이러한 규제는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헌법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 근거가 된 유통산업발전법의 조항에 대해 재판관 다수의견으로 합헌 결정이 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헌 여부와는 별개로 영업 규제의 실효성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케아(IKEA) 같은 외국의 대형 유통업체는 법의 허점으로 규제를 받지 않고, 급식 시장에서는 국내 시장에 진입한 외국 대자본의 국내 법인이 중소기업의 형식을 취해 국내 시장을 잠식한다. 그 결과 대기업에 대한 규제로 오히려 대기업 점포에 입점하는 영세 상인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빈번하다.

정부 실패의 폐해는 설명 부족

그라픽=최종윤

그라픽=최종윤

EBS가 2020년 발간한 ‘수능특강 사회탐구영역 경제’ 교재에 따르면 정부 실패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악화시키는 현상’이다. 원인으로 불완전한 지식과 정보, 이윤 동기의 부족, 관료집단의 이기주의, 정치적 제약, 이익집단의 압력을 들고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따른 고용 참사, 공급 측 요인을 무시한 23차례의 주거안정 대책에도 오히려 오르는 수도권 집값, 일류 기업인 두산중공업의 구조조정을 가져온 탈원전 정책 등 정부 실패의 부작용 사례는 현 정부 들어서도 적지 않다. 정부 실패의 다양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시장 실패를 부각하면서 큰 정부를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경제교육에서 노동자의 인권과 환경 등을 고려하는 윤리적 소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소비자인 학생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윤리적 소비를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고등학교 교과서는 ‘윤리적 소비’가 ‘합리적 소비’보다 바람직한 소비임을 강조한다. 합리적인 선택이 윤리적이지 않은 소비로, 또는 윤리적 소비가 비합리적 소비로 학생들이 오인하도록 하고 있다.

기업의 구성원은 노동자·중간관리자·경영자·주주 등 다양하다. 기업이 생존과 성장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여러 이해관계자가 만들어져서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기업이 운영되고 성장하는 게 일반적 원리다. 그러나 기업의 이해관계자를 기업가와 노동자로 단순화해 역할을 제시하는 것은 학생들이 기업 일부로 기업 전체를 이해하도록 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더구나 국내 취업자의 75%에 달하는 2000만 근로소득자의 일자리를 만드는 고용주로서 기업의 역할에 대한 설명도 너무 소홀하다.

초·중·고등학교 경제교육에서 시장경제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기업가 정신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재화 및 서비스의 공급, 노동자의 소득으로 연결되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시장에서의 기업 본연의 역할보다는 기업가의 바람직한 역할을 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법원에서 합법적인 경제활동으로 판결을 받는 모빌리티 사업인 ‘타다’를 총선 직전에 국회가 법을 제정해 불법으로 만들었는데도 기업가 정신을 죽이는 우리 경제의 현실에 대한 설명은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학생들은 초등학교에서는 사회, 중학교에서는 역사,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사 교과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대해 배운다.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 너무 강조

시장의 한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제 교육

시장의 한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제 교육

산업화 성과에 대한 교과서 분량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는 72%였으나 중학교 역사 교과서 65%,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47.1%로 줄어든다. 반대로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라 발생한 문제점 및 과제에 대한 설명의 분량은 늘어난다.

교과서 내용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이 강조된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는 1955년부터 2015년까지의 우리나라의 국내 총생산 및 1인당 총소득의 변화와 관련된 도표 등을 제시해 경제 발전의 성과를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다’ ‘도시 빈민 문제가 발생하다’ ‘시장 개방과 위기에 처한 농촌 현실’ ‘높은 교육열, 과중한 교육비’ ‘빈부 격차의 심화’ 등 급속한 산업화의 문제점이 부각돼 있다.

한국은 자유경쟁을 통한 효율적인 자원배분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해 개발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되었고, 개발도상국 중 유일하게 주요 20개국(G20)에 진입했다. 학교 교육에서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산업화의 공과를 균형 있게 가르쳐야 한다. 역사교육 관점에서도 바람직하고,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체제의 장점을 학생들이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현재의 교사 임용제도에서는 경제학 기초 과목을 대학에서 수강하지 않아도 사회과 과목을 중·고교에서 가르칠 수 있다. 고등학교 통합사회 집필진 중 학부나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저자는 한 명도 없다. 대부분이 윤리교육과·사회교육과·지리교육과 전공자다.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의 학부 및 대학원 전공은 역사교육·한국사·사학이다. 교사에 대한 경제교육을 강화하고 교과서 집필진에 경제학 전공자를 포함해야 하는 이유다.

최저임금, 주 52시간제,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전형적인 정부 실패

정부 실패의 전형적인 사례는 현 정부의 노동시장 개입이다. 대통령 임기 내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취임 초 2년간 각각 7.3%, 16.9% 올렸다. 그러나 2018년 일자리 증가는 9만7000여 명에 불과했다. 저임금 근로자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하위 20% 가구의 2019년 월평균 소득은 정부의 노인 일자리 사업에도 불구하고 2017년과 대비해 20여만 원 정도 적다.

3차, 4차 년도 최저임금은 각각 2.87%, 1.5% 인상돼 문재인 정부의 4년간 평균 최저임금 인상률은 결국 박근혜 정부와 비슷해졌다. 시장에 순응하면서 순차적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했다면 고용 참사, 영세자영업자의 피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획일적이고 준비 없는 주 52시간제도 도입으로 중소기업의 경영이 어려워졌고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충분한 대비 없이 시작하면서 두 번의 유예를 거쳐 300인 이상 기업에 먼저 시행되었고, 300인 미만의 기업은 현재 실질적인 시행이 1년 유보된 상황이다. 탄력근로제 도입 등 개선책이 52시간제 시행 초기부터 논의되고 있으나 진전은 더디다.

정규직 전환의 공정성과 관련해 ‘인국공 사태’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현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기대효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2019년 비정규직 수는 1년 새 87만 명이 늘어나 748만 명으로 역대 최대치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도 확대됐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이 글은 2020년 가을 발간 예정인 『교육이 없는 교육』(박영범 외)에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