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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춤이 들려요”…보지 못해도 즐기는 배리어프리 무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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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안대로 눈을 가렸다. 긴장감이 흐르는 배경 음악과 함께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린다. 희미하게 말 우는 소리에 ‘혹시 서부극인가’ 싶다. “무슨 소리가 들리셨나요?” 강사의 물음에 대답은 제각각이다. “총소리 같아요” “잘 모르겠지만 긴박한 상황인 것 같아요”. 안대를 벗고 보니 드라마 ‘도깨비’의 과거 회상 장면이다.

시각장애인이 현장감 느낄 수 있게 #무용수 움직임·스토리 말로 ‘번역’ #공연 전 의상·소품 만져보기 투어 #국내 배리어프리 공연 아직 미미 #무용계, 전문인력 양성 나서기로

시각 정보가 없으면 소리 정보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음을 깨달은 건 지난 9일 전문무용수지원센터 댄스스튜디오에서 열린 ‘무용음성해설 워크숍’에서다. 국내 최초로 ‘무용음성해설가’를 양성하는 프로젝트로, 전문무용수지원센터와 프로듀서그룹 도트·아시아나우(AsiaNow)·국립현대무용단이 7일부터 8월 11일까지 공동 주최하고 있다.

‘마이너스16’의 한 장면

‘마이너스16’의 한 장면

‘무용음성해설’이란 시각장애인들도 무용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움직임과 스토리 등을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작업이다. 시각장애와 무용 사이의 머나먼 거리를 확 좁히려는 시도다. 이번 행사에는 영상 분야 화면해설 작가인 강내영 사운드플렉스 스튜디오 대표와 영국의 무용음성해설가(audio describer) 엠마 제인 맥헨리가 강사로 참여했다. 시각장애인 이해 증진을 위한 배리어프리 프로덕션에 대해 설명하고 음성해설 실무 전반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호주를 포함한 영미권과 북유럽 등 공연 선진국에선 이 같은 배리어프리 프로덕션이 1980년대부터 시작돼 이미 정착 단계다. 영국의 음성해설 전문 기업 보컬아이즈 조사에 따르면, 영국 극장의 40%가 시각장애자에게 친화적이고, 내셔널씨어터 등 국공립극장은 작품당 2회 가량 음성해설 공연을 운영한다.

스토리 전달을 넘어 시각장애인에게 생생한 경험을 전달해 공연을 더 즐길 수 있게 하는 ‘터치 투어’도 있다. 공연 전 세트와 의상, 소품 등을 만져보면서 작품에 대해 정보를 얻고, 배우와 음성해설사의 목소리도 들어보는 코스다.

무용 분야는 타장르 공연보다 늦은 1998년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에서 음성해설이 처음 시도됐다. 에딘버러 페스티벌은 매년 3~6편의 무용공연 음성해설을 하고 있다. 최석규 아시아나우 대표는 “사우스뱅크센터, 링컨센터 등 영미권 주요극장에서는 배리어프리 작품 제공이라는 관점보다 극장이 기본적으로 제공해야 할 접근성 관점에서 서비스가 제공된다”면서 “극장보다 창작단체 예술가들이 음성해설을 주도하면서 극장과 협력해 확산되는 추세”라고 전했다.

7일 시작된 무용음성 해설워크숍 현장. [사진 박수환]

7일 시작된 무용음성 해설워크숍 현장. [사진 박수환]

국내 공연계의 배리어프리는 걸음마 단계를 막 벗어났다. 2010년대 들어 1~10편씩 제작되다가 지난해 26개 작품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가 연극 ‘7번 국도’ 등 4개 작품에서 수어 통역과 음성 해설, 자막을 제공해 100여 명의 장애인 관객이 관람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지난 4월 탈춤극 ‘오셀로와 이아고’에서 국내 최초 배리어프리 공연 실황 중계를 시도했다.

지금껏 연극·오페라·뮤지컬 장르에서 총 72편의 배리어프리 공연이 제작됐지만, 무용공연 음성해설은 불모지에 가깝다. 엠마 제인 맥헨리가 해설했던 2018년 ‘한영 상호교류의 해’ 폐막공연 ‘공·空·Zero’가 최초이자 유일하다. 이번 워크숍에 무용인들의 관심이 쏠린 이유다.

20명 모집의 입문 과정에 평창겨울올림픽 폐회식 안무가 차진엽 등 90여 명이 몰리자 줌 원격수업을 동원해 전원에게 개방했다. 지금은 선발된 인원을 대상으로 창작실습과정이 진행 중이다.

16일 엠마 제인 맥헨리의 원격 강의에 참여해보았다. 영국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과 오하드 나하린의 ‘마이너스 16’의 해설을 실습하는 시간이었다. 수강자들은 서사가 있는 고전발레에 비해 추상적인 현대무용을 해설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빠르고 격렬한 움직임을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가 관건이었다. 수강자 중 무용 비전공자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춤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무용수 출신이 탁월했다. 지난해 국립현대무용단의 ‘루돌프’를 안무했던 고블린파티 이경구 안무가의 ‘마이너스 16’ 해설은 동작 디테일 묘사가 정확하고 의태어를 적절히 활용한데다 생생한 리듬감과 에너지의 강약까지 전달해 큰 박수를 받았다.(그래픽 참조)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향후 장기 프로젝트로 무용음성해설가를 양성해 국내 배리어프리 공연 활성화에 발맞춰 나갈 계획이다. 박인자 이사장은 “해외에서는 다양한 무용공연들이 음성해설 버전으로 제작되고 유명 무용수가 음성해설가로 직업전환한 사례도 있지만, 한국에선 아직 미지의 세계”라며 “지속적인 네트워킹의 장을 마련하고 아카데미, 워크숍을 통해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 전문가를 양성할 계획이다. 그러려면 무용음성해설가에 대한 수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고 극장 시스템 등 제반시설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관심을 호소했다.

무용 음성해설가 엠마 “난 안내자…장애관객이 해석할 여지 남겨야”

터치 투어를 진행하는 엠마 제인 맥헨리. ⓒEmma-Jane

터치 투어를 진행하는 엠마 제인 맥헨리. ⓒEmma-Jane

무용수 출신인 엠마 제인 맥헨리는 유럽 최초로 무용음성해설을 시작한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에서 음성해설가로 입문했다. 영국에도 무용 전문 교육기관은 따로 없어 연극과 영화 위주인 스코틀랜드 음성해설협회에서 관련 교육을 받았다. 무용가로서의 경험을 살린 다양한 접근 방식을 스스로 개발해 15년 이상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말이 없는 무용을 해설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 정보와 암시적인 표현 사이의 세심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운동 어휘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갖추면 운동의 질감, 연주자 간의 상호 작용까지 표현할 수 있다. 결국 무용수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왜 움직이는지, 작품의 핵심적인 순간을 표현할 동작 언어를 골라내야 하는 일이다.”
춤의 아름다움을 언어로 통역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미학적 가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음성해설의 목표는 공연 예술을 청각적으로 묘사해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향상시키고 그들에게 생각거리와 예술적 울림을 제공하는 것이다. 비시각장애 관객도 각자 작품에 대한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장애관객이 어떤 것을 느끼게 할지 통제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해석을 위한 공간과 여지를 제공해야 한다. 무대 위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공연을 탐색해 주요 순간으로 안내하는 것이 내 임무다. 그들이 직접 작품을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 라이브 공연의 미학이다.”
기억에 남는 관객 반응은.
“크리스마스 발레 공연 후 시각장애인 딸과 그 엄마를 만났다. 딸은 전부터 엄마의 속삭임에 의지해 발레를 감상했는데, 음성해설로 인해 처음으로 발레를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었다고 했다. 엄마도 캐치하지 못한 부분을 엄마에게 알려 주기까지 하더라. 시력을 잃기 전 댄서였던 한 여성은 생생한 음성해설을 들으며 다시 춤추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무용을 본 적 없는 사람이 무용 해설을 통해 뭘 얻을 수 있을까.
“공연을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음성해설을 통해 창의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적용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그들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반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춤은 움직이는 몸에 관한 것이라, 안무를 몸의 움직임으로 쪼개어 묘사하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몸으로 연상해 반응할 수 있다. 춤이 음악 및 음향과 함께 묘사될 때 보이지 않는 이에게도 새로운 경험의 레이어가 더해질 것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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