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20명 방조했다는 서울시, 압수수색 기각한 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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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 측이 어제 두 번째 기자회견을 열었다. 9일 전 1차 회견에선 박 전 시장이 저지른 일상적 성추행의 내용을 공개했다면 이번엔 서울시청 직원들의 묵살과 방조를 자세히 폭로했다.

피해자 측 김재련 변호사는 “4년이 넘는 동안 20명 가까이 되는 전·현직 비서관들에게 호소했지만 묵살당했다”고 말했다. 성추행당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에게 “몰라서 그랬겠지” “예뻐서 그랬겠지”라며 철저하게 가해자를 옹호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30년 남은 공무원 생활을 편하게 해줄 테니 비서로 와라”는 월권적 발언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벌어진 성추행을 묻고 넘어가자는 은폐나 외면을 넘어 앞으로도 성추행을 당할 수 있지만 그냥 견디라며 적극적으로 방조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이들 대부분은 피해자보다 직급이 높고, 이 문제를 시장에게 전달해야 하는 인사담당자도 포함돼 있었다는 게 피해자 측 주장이다.

이런 의심을 받는 서울시가 자체조사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실을 은폐하는 쪽으로 흐를 것이란 우려가 나올 만하다. 서울시는 지난주 외부 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하겠다고 한데 이어 외부 인력만으로 조사단을 꾸리겠다고 하는데도 구성조차 잘 안되자 결국 자체 조사 계획을 철회했다. 피해자 측이 조만간 국가인권위에 진정하겠다는 입장인 만큼 차분히 조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또 이 조사는 단순히 행정착오를 바로잡는 수준이 아니다. 수위에 따라서는 처벌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수사기관이 조기에 증거를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 법원은 지난주 박 전 시장의 통화내역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한 데 이어, 이번엔 서울시 청사와 박 전 시장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수색영장도 기각했다. 경찰에 따르면 “압수수색의 필요성이 부족하다”는 게 법원이 밝힌 기각 사유다. 이쯤 되면 법원은 박 시장 성추행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법원은 짧고 모호한 기각 결정문 뒤에 숨어 진실을 가릴 게 아니라 진실 규명이 필요치 않다고 판단하는 이유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

아울러 2차 기자회견에선 피해자 측이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시키기 하루 전 검찰에 먼저 알린 사실도 공개됐다. 가해자가 박 전 시장이란 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면담 약속을 잡았으나 이내 면담이 취소됐다고 한다. 현재 피해자의 고소 사실이 먼저 박 전 시장 측에 유출된 경로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검찰은 면담이 취소된 이유와 이후 처리 과정에 대해 명백히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