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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호소인 표현이 맞다" 주창자는 민주당 젠더TF 남인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 정치권서 피해 여성을 지칭하는 여러 표현. 그래픽=신재민 기자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 정치권서 피해 여성을 지칭하는 여러 표현. 그래픽=신재민 기자

 피해자, 피해 호소인, 피해 고소인, 피해 호소 고소인….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전직 비서 A씨를 호칭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에선 많은 개념어가 속출했다. 그중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사용한 '피해 호소인'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일명 ‘미투(Me Too·나도 피해자) 국면’에서 피해 사실을 폭로·고발한 경우 ‘피해자’로 통칭했던 것과 다른 이 표현이 정치적 선 긋기를 위한 전술적 선택으로 읽히면서다. '피해 호소인'은 어떻게 민주당의 공식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됐을까.

발단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피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 진술이 나온 상황에선 피해자로 명명하는 것이 맞다"며 민주당을 저격했다. [뉴스1]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피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 진술이 나온 상황에선 피해자로 명명하는 것이 맞다"며 민주당을 저격했다. [뉴스1]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이후 정치권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쓴 것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였다. 지난 10일 박 전 시장 빈소를 찾은 심 대표는 당시 조문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피해 호소인에 대한 신상털기나 2차 가해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이 '피해 호소 여성''피해 호소인'을 공식 용어로 내세운 건 3일 뒤였다. 지난 13일 이 대표는 당 고위전략회의서 “피해 호소 여성의 아픔에 위로를 표하고 이런 상황에 이른 것에 사과한다”고 했고, 이튿날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도 “피해 호소 여성에게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표현법을 둘러싼 각종 논란에도 이 대표는 지난 15일 “피해 호소인의 뜻에 따라 서울시가 피해 경위를 철저히 밝혀주길 바란다”며 같은 표현을 고수했다.

민주당의 표현이 심 대표의  말에서 얻은 아이디어인지는 확실치 않다. 15일 이 대표가 읽은 사과문 작성에 관여한 당 관계자는 “처음부터 피해 호소인이란 표현을 들어 (사과문도) 그렇게 작성했다”고 말했다. 피해자라는 표현 대신 피해 호소인으로 지칭한 이유에 대해선 “생각을 안 해 봤다. 잘 모르겠다”라고만 했다.

논리

더불어민주당 젠더폭력근절대책TF 단장을 맡고 있는 남인순(가운데) 최고위원.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젠더폭력근절대책TF 단장을 맡고 있는 남인순(가운데) 최고위원. [연합뉴스]

민주당 내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은 당 젠더폭력TF 위원장을 맡은 남인순 최고위원이었다. 민주당의 핵심당직자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남 최고위원이 당 윤리규범을 근거로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동료 의원들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남 최고위원이 제시했다는 근거는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를 담고 있는 당 윤리규범 제14조다. 피해자와 피해 호소인이 개념적으로 구분돼 있다. 이 조항에는 "당직자와 당 소속 공직자는 피해자(피해 호소인을 포함한다)와 관계자의 의사를 고려하여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피해를 일방적으로 호소하는 사람도 피해자와 다를 바 없이 취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조항이지만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남 최고위원의 주장은 그런 구분을 했다는 것 자체가 피해자와 피해 호소인 개념을 분리해서 다루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남인순 최고위원이 동료 의원들에게 글을 하나 공유했는데 ‘피해 호소인’은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을 경우 앞장서는 여성단체에서 많이 써 왔던 표현이라는 내용이었다”며 “이번 사안은 진상을 파악하기 굉장히 어려운 데다 당사자가 고인이 됐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바라본다는 차원에서 피해 호소인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공방

표현을 둘러싼 논란에도 이해찬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했다. [연합뉴스]

표현을 둘러싼 논란에도 이해찬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했다. [연합뉴스]

민주당이 사용한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은 논란을 촉발하며 정치 공방으로 번졌다. 미래통합당이 “혐의 사실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려는 것이고 2차 가해를 조장하는 일”(유의동 미래통합당 의원)이라는 비판에 나서면서다. 판사 출신의 전주혜 통합당 의원은 지난 15일 “혐의가 확정되지 않아도 공소장에 피해자라고 쓴다. 민주당이 이 사건을 '의혹' 수준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피해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전 시장 장례 국면에서 '피해 호소인' 표현의 원조였던 정의당은 선회했다. 심 대표는 16일 상무위원회의에서 “'피해 호소인' 은 상대를 아직 피해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에 적절하지 않다”며 민주당을 공격했다.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됐고,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 진술이 나온 상황에선 ‘피해자’로 명명하는 것이 맞다”(정의당 관계자)는 게 입장 변화의 이유였다.

균열 

국가공무원 성희롱·성폭력 신고처리 업무지침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피해자로 정의한다. [중앙포토]

국가공무원 성희롱·성폭력 신고처리 업무지침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피해자로 정의한다. [중앙포토]

남 최고위원 등의 해석론은 문재인 정부의 공식적인 방침과도 어긋난다. 지난해 5월 시행된 '국가공무원 성희롱 성폭력 신고처리 업무지침'은 용어 정의를 통해 피해자를 “성희롱·성폭력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 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피해자와 피해 호소인의 개념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2차 가해에 해당한다는 야당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1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공무원 인사관리규정’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 과정과 방법 등의 내용을 담은 관련 규정 제4조는 피해자의 범위를 “성희롱 또는 성폭력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 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 과정에선 피해자와 피해 호소인을 구분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내분 

지난 13일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진행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 현장.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한 고소인 측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위력에 의한 박 시장의 성추행이 4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뉴스1]

지난 13일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진행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 현장.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한 고소인 측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위력에 의한 박 시장의 성추행이 4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뉴스1]

‘피해 호소인’이란 표현의 파장은 이제 민주당 내부로 확산하고 있다. 이경 부대변인은 16일 페이스북에 박 전 시장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평소에 어떤 분인지 알기에 말문이 막히고 마음이 복잡하다”며 “그럼에도 여성은 피해 호소인, 피해 고발인이 아닌 ‘피해자’”라고 했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의원들도 점차 늘어났다. 박주민 최고위원은 지난 15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피해자라는 표현이 (피해 호소인보다) 조금 더 드라이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반면 이낙연 의원은 페이스북 게시글에서 A씨를 ‘피해 고소인’이라고 표현했다.

민주당의 한 청년 당직자는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청년 당직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당 지도부에 더 이상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제 와서 피해자라고 표현을 정정할 경우 ‘정치적 의도’라는 비판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고, 계속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고수하자니 그것 역시 부담스럽다”라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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