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나도 그림 한점 살수 있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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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퇴근길 인사동 골목, 전시회가 새로 열리는 날이라 화랑엔 공짜 술에, 떡에, 푸근한 인심과 함께 멋쟁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다. 거기다 공짜 그림 구경까지.

한데 난 언제부터인가 그림 값은 아예 묻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다. 욕심을 내본들 내 분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비싸단 표현은 안 쓰기로 하겠다. 혼신의 힘을 다한 필생의 역작에 결례될까 봐서이다. 욕심은 나고 살 형편은 못되니 은근히 화가 난다. 내 분수라고 했지만 나 같은 월급쟁이도 아껴 모아 일년에 그림 한점 쯤 살수 있어야 할게 아닌가.

이건 과분한 욕심이 아니다. 소위 소장가의 손에 넘어가 값이 뛰기만을 기다리며 창고에서 썩느니 보다.

저런 그림이 국제 시장에선 얼마나 갈까? 국제 경쟁력이라도 갖추고 있는 걸까? 홧김에 별 악담 다 나온다. 하지만 외국 시장을 둘러보면 솔직히 걱정이다. 난 얼마전 어느 문화인 모임 경매에서 소련 작품을 20만원에 샀는데 볼수록 마음에 든다.

해서 난 전시장을 둘러보며 『어느걸 훔칠까』 짜릿하고 술렁이는 고민을 하며 즐긴다. 어차피 살 형편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이라도 하면서 보는 맛도 나쁘진 않다. 문제는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그림을 보는 안목이 생기겠나. 살 생각으로 봐야 진지한 자세가 될게 아닌가. 그리고 아끼는 사람들이 보다 관심을 갖고 화랑을 찾을게 아닌가.

그림의 떡이라 체념한 체 건성으로 보니 내 수준이 언제까지나 치졸하고 저급이다. 그게 누구 책임인가.

이게 어찌 나만의 문제랴. 문화수준이 낮은 건 그림 값이 높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미술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난 진단하고 있다.

왜 그렇게 비싸요? 끝내 막가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 값이 싸면 작가도 싸구려 취급을 받기 때문에 체면상 비싸야 한다고 귀띰해준다. 해서 한 점도 안 팔리는 전시회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거 잘됐다. 제가 무슨 억대 일류라고!" 물론 속으로 중얼거린 내 고약한 심보에서다.

"그러고 어떻게 작품활동을?" "말이 아니지요"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그려야죠. 언젠가의 그날을 위해.

그래서였을까 인사동 골목을 빠져 나오며 문득 반고흐 생각이 난다. 살아 있는 동안 딱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않은, 알아주는 이도, 관심도 없었다. 안 판 건지 못 판 건지도 분명치 않다. 하지만 얼마 전 해외 토픽엔 그의 '헌 구두' 그림 한 점에 30억에 팔렸다는 소식이다.

난 그가 연작으로 그린 헌 구두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본 것만도 여러 장이지만 하나같이 낡아빠진, 바닥엔 구멍이 뻥 뚫린 구두다. 자기 것인지, 광부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쉽게 접하고 바라 볼 수 있는 건 헌 구두 뿐. 가난한 그가 미인 모델을 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그것밖에 달리 그림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만약 번쩍거리는 새 구두를 그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의 주변엔 물론 새 구두가 있을 턱도 없지만, 낡고 헌 구두였기에 그 그림엔 천근의 무게가 실린다. 지치고 힘든 인생 길을 터덜터덜 쉼 없이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겹겹이 쌓여 있다. 낡은 구두였기에 거기에 철학적 뉘앙스까지 많은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난했지만 그의 예술은 풍요롭다.

배부른 예술가를 경멸하는 풍자는 지금도 남아있다. 배가 부르면 예술이 안 된다는 극단론자의 목소리는 지금도 살아있다. 반고흐의 인생과 예술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논리도 설득력이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실감이 난다. 하지만 왜 예술가라고 꼭 가난해야 할까. 세계적인 예술가중엔 부자도 많다. 우리 화단도 좀 넉넉했으면 좋겠다.

견문도 넓히고, 안락한 화실, 그림 재료라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궁색하지 않아야 그림도 넉넉할 게 아닌가.
묘안이 없을까를 생각하다 쓴 소리도 하게 되었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李時炯(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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