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차로 유명을 달리 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과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시민 분향소는 390미터 정도 떨어져 설치돼 있다. 불과 400미터가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시민사회가 둘로 쪼개지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시청 앞에서는 12일 낮 한때 양쪽 추모객 중 일부 인사들 간에 몸싸움과 고성 등 험한 장면이 벌어졌다.
양쪽은 박 시장과 백 장군의 장례 형식을 두고도 날카롭게 대치했다. 박 시장 분향소를 찾은 사람들은 친일 행적이 있는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이 과분하다고 주장했고, 백 장군 분향소를 찾은 인사들은 사망 전 성추문 사건에 연루된 박 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 절차가 부적절하다고 맞섰다.
백 장군 추모객 "한국전에서 나라 지켜낸 영웅"
이날 오전 박 시장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도서관에서 직선거리로 약 390m 떨어진 동화면세점 앞에는 ‘고 백선엽 장군 분향소’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근조'(謹弔)라고 쓰인 검은색 현수막 아래로 분향소가 마련됐고 백 장군의 초상화와 화환이 자리를 잡았다. 군가도 울려퍼졌다.
분향소를 마련한 보수단체 일파만파의 김수열 회장은 “백 장군을 편안하게 분향하고 싶은 이들이 많은데 추모 공간이 마련된 게 전혀 없어 나서게 됐다”며 “성추행 의혹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 시장은 서울특별시민장이고,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낸 영웅은 분향소조차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형평성이 맞지 않는 데다 공무상 순직이 아닌 박 시장의 장례를 세금으로 치르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게 김 회장 주장이다.
백 장군의 분향소는 인근 지역에 한 곳 더 추가로 마련됐다. 시청에서 세종대로를 따라 약 740m가량 떨어진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이다. 하루 전인 11일 저녁 8시께 설치를 마쳐 12일 오전에는 70여명의 시민이 헌화하고 백 장군의 영정에 절을 올렸다. 서울 동작구에서 온 양모(76·남)씨는 “6·25로 피난 생활을 했던 시절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백 장군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다. 최소한 육군장(葬) 혹은 국가장으로 치러져야 순리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햇다.
박 시장 추모객 “시민 위해 사심없이 일해”
백 장군 분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울시청 앞에서는 정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백 장군의 친일 행적을 고려하면 국가장이나 육군장은 지나치다는 의견이다. 서울시 중랑구에 사는 김모(59·남)씨는 박 시장 조문을 마치고 나오며 “그간 인권 변호사 등 시민을 위해 사심없이 일한 박 시장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왔다”며 “백 장군의 경우는 한국전쟁서 세운 공적은 인정하지만 친일 행적이 사라지지는 않으므로 국민 정서를 고려하면 국가장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조문객 송모(53·남)씨 역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말한 백 장군의 명언을 기억하지만, 친일 행적을 고려하면 국가장은 무리”라고 말했다. 반면 박 시장의 장례형식이 지나치다는 보수단체 비판에 대해서는 “박 시장 역시 성추행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죽음으로 죗값을 대신했다고 생각한다“며 “9년간 청년임대주택, 반값 등록금 추진 등 서민을 위한 정책을 높이 평가하는 만큼 서울특별시장이 지나치지는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3시쯤에는 시청 앞 광장에서 박 시장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박 시장의 장례형식을 문제 삼는 시민 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문재인 퇴진'이라는 붉은 머리띠를 모자에 두른 한 중년 남성과 여성이 '박원순 성추행범 서울시장(葬) 반대' 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나타나자 일부 시민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라. 이곳이 어디라고 오느냐”며 “매국노는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경찰은 이들을 강제로 분리시켰다.
박 시장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박 시장의 성추문 의혹에 대한 문제제기와 관련해 “간도 특설대 아녀자를 무자비하게 죽인 백 장군에 대한 문제제기는 안 하면서 왜 박 시장에 대해서만 걸고 넘어지느냐”며 “백 장군은 대전 현충원 안장도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박 시장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오후 5시까지 약 1만6000여명의 시민이 박 시장을 조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시청 정문 앞에는 박 시장을 추모하는 노란색 포스트잇과 꽃다발이 놓였다. 백 장군 분향소에는 이날 오후 5시 기준 약 5000명의 추모객이 다녀갔다. 20여개의 화환이 분향소를 감쌌고 현수막에는 '세계 전사(戰史)에 빛나는 구국의 영웅' 이라는 문구가 붙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