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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희→김혁철→김명길→최선희→? 비건 협상파트너 잔혹사

중앙일보

입력

8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회담을 마치고 나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8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회담을 마치고 나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 위원장이 협상 권한이 있고 잘 갖춰진 나의 카운터파트를 지명한다면….”

8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한국 측 카운터파트(협상 상대)인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의 협의 이후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다.

공개적으로 비건 부장관의 북한 측 카운터파트로 여겨져 온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권한도 없고 준비가 안 돼 자신과 마주 앉을 수 없는’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그간 북한의 계속된 대화 거부와 도발에도 차분한 대응을 유지해왔던 '비건 스타일'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건 부장관은 지난 2018년 8월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로 임명된 뒤, 벌써 세 번이나 북한이 카운터파트를 바꿨다.

◇'성골 출신' 외무성 최선희와 짧은 상견례 

최선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제1부상. [연합뉴스]

최선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제1부상. [연합뉴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첫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직후 대북특별대표로 임명된 비건은 그해 10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길에 함께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직접 '비건의 카운터파트는 최선희'라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최선희의 직책은 외무성 부상이었다. 이후 한국을 방문한 비건은 "내 카운터파트에게 가능한 한 빨리 보자고 초청장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선희는 비건의 공식 '구애'에 대해 이렇다 할 응답이나 확인이 없었다.

3개월이 지난 2019년 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회의가 진행됐는데, 이곳에서 비건은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최선희를 처음 만났다. 임명 후 약 150일 만의 첫 상견례였다.

스톡홀름 도심에서 약 50km 떨어진 외딴 산장에서 진행된 이 협상에는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도 함께했다. 북핵 문제를 담당하는 남ㆍ북ㆍ미 협상대표들이 최초로 다 같이 모인 자리였다.

◇한 달 만에 통일전선부 '전략가' 김혁철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 [연합뉴스TV]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 [연합뉴스TV]

그러나 북한 내부에서 대미 협상 주도권을 두고 통일전선부와 외무성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면서 '최선희 아웃설'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만인 그해 2월 북한은 외무성이 아닌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김혁철 전 주스페인 북한대사를 임명했다.

외무성이 아닌 김정은이 위원장인 국무위원회 산하에 대미특별대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 의지를 보였다고 할 수 있지만, 최선희의 '아웃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비건은 자신의 새로운 카운터파트이자 '전략가'로 평가받는 김혁철 당시 대미특별대표와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까지 하노이에서 수차례 실무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OK 사인'에만 의존해야 하는 북한의 권력구조로 인해 비건은 자신의 카운터파트에 대한 불만족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비건은 하노이 회담이 빈손으로 끝난 뒤 한 대담에서 "아무 권한이 없는 북한 상대(김혁철)와의 협상은 많은 스트레스였다"라고 털어놓았다.

◇'미국통' 김명길에서 돌고 돌아 다시 최선희?   

2019년 2월 20일 베트남 하노이에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당시 주베트남 북한대사였던 김명길 대사가 출근하고 있다. [뉴스1]

2019년 2월 20일 베트남 하노이에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당시 주베트남 북한대사였던 김명길 대사가 출근하고 있다. [뉴스1]

하노이 회담 결렬로 북한에서는 통일전선부의 위상이 하락하고 외무성이 다시 대미 협상 주도권을 쥐었다. 2019년 4월 최선희가 외무성 제1부상(차관급)으로 승진하며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자신의 첫 카운터파트였던 최선희의 승진으로 비건의 카운트파트는 이번엔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실무협상 수석대표)로 바뀌었다.

그해 10월 비건은 김명길 수석대표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나 실무협상을 진행했지만, 6시간 동안 양측의 입장을 전달하는 데 그쳤다. 협상은 없었다고 한다.

그해 12월 비건도 차관급인 국무부 부장관으로 승진했다. 이에 따라 비건의 맞상대는 다시 돌고 돌아 최선희가 될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비건의 방한에 앞서 최선희는 담화를 통해 "미국과 마주 앉을 생각이 없다"고 못 박았다. 이에 비건은 방한 중 공개적으로 '최선희는 나의 맞상대가 될 수 없다'고 밝히면서 역공에 나섰다.

지난해 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난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 특별대표. [연합뉴스]

지난해 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난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 특별대표. [연합뉴스]

앞으로 비건의 카운터파트가 누가 될지에 대한 최종 결정은 전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에 달렸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미대화가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북한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상황이다.

다만, 북한은 지난 3월 외무성 산하에 '대미협상국'을 신설했다. 비건과의 실무협상을 대비한 조치라는 평가가 당시 나왔다. 특히 북한이 지금까지 대외협상에서 늘 상대국보다 한 급 아래의 카운터파트를 보내왔던 전례를 고려하면 최선희 외에 대미협상국장이 비건의 카운터파트가 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까지 북한의 초대 대미협상국장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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