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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추돌 사고에도 말없이 헤어진 두 운전자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48)

안동은 오백년이 넘는 문화와 역사를 가진 공동체 마을이 많다. [사진 군자마을 홈페이지]

안동은 오백년이 넘는 문화와 역사를 가진 공동체 마을이 많다. [사진 군자마을 홈페이지]

쉬는 날, 문화재 해설 봉사 당번이 되어 꽃단장하고 길을 나선다. 나는 문화와 역사도 배우면서 지역사회에도 봉사하는 동호회 회원이다. 유능한 전문 해설사의 자발적인 소모임으로 정상 근무 외의 자투리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있다. 안동은 오백년이 넘는 문화와 역사를 가진 공동체 마을이 많다. 오랜 역사가 있지만 시내에서 떨어져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전통 마을 한곳을 소개한다.

내가 근무하는 곳도 역사가 있는 고택이라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모임은 전문 해설사가 아니어도 봉사할 수 있는 곳이다. 십여 명의 회원이 가족 같은 분위기로 모여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참 좋다. 나는 배운다는 마음으로 참여하지만 밥만 축내는 회원으로 보일 듯하다. 방문하는 사람들 앞에서 입도 벙긋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을 희망하며 역사 강의도 많이 듣고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 앞에 서면 숙제로 외운 것은 생각이 하나도 안 나고 입도 안 열리는 왕초보가 된다. 그래도 마음은 늘 멋진 해설을 하는 꿈을 꾼다. 당번 서기 전날 저녁엔 거울 앞에서 간단한 자료를 읽어보며 연습을 한다.

오늘은 안동이 고향인 십년이 넘는 베테랑 해설사와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해 봉사하고자 나온 초보 회원이랑 함께 세 명이 짝이 되었다. 궂은 날씨에도 손님이 많이 온다. 서울에서, 수원에서, 원근각처에서 지나는 길목인 이곳을 들른다. 고향의 자랑과 자부심, 오래된 민담을 풀어낸다. 재미있으면 10분 해설을 원하던 사람들이 ‘더 해주세요’를 외친다.

초보라고 다 같은 초보가 아니다. 처음 만난 그 회원은 초보라도 박학다식하고 말씀도 잘한다. 틈새에도 안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역사 이야기 등 세세한 해설용 자료를 알려준다. 멋진 선생님과 당번이 되어 행복하고 또 아주 부럽다. 고마운 마음에 쉼터를 청소하며 사진이라도 열심히 찍어서 모아놓았다. 봉사를 마치고 오는 길에 앞차의 등에 붙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길게 써 붙여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초보운전’, ‘처음 나왔어요’, ‘당황하면 후진함’, ‘저 지금 까칠해요’ 등등 애교를 부리며 양해를 구하는 수많은 글에 슬그머니 웃음 지으며 속도를 줄이고 때론 기다려 주기도 했는데, 오늘 본 글자는 참 진지하다. 어쩌면 초보에 임하는 자세부터 촐싹대지 않고, 진중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듯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어쩌면 겉모습에 치중하느라, 깊고 오래된 문화를 배우고 익히기를 허투루 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머리 나쁜 것을 나이 탓이라고도 우겨본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시 주눅 들어도 결론은 언제나 긍정해답이다. ‘까짓거 해설을 잘 못 한들 어쩌랴. 옆에서 추임새를 넣고, 사진을 찍어주고, 또 그 해설을 듣는 한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지. 모두 다 말 잘하면 그것도 비정상이지. 무엇이든 호기심을 갖고 도전해 보려는 자세만으로도 즐겁게 나이 들며 사는 방법이야.’ 다시 초보의 자세로 돌아가 선배가 주신 자료를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글의 주제에서 살짝 비껴가지만 허영만 만화 ‘사랑해’의 한 부분을 각색해봅니다.

초보운전 연수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신혼부부가 있습니다.
캄캄한 길, 한적한 도로에서 앞서가던 승용차가 달려오는 차와 정면충돌했습니다.
이제 곧 운전사가 튀어나와 막말과 함께 시시비비를 하겠지요.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도 차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죽은 걸까요?
잠시 후 한 대의 차가 뒤로 약간 후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침묵.
두 사람은 서로를 그윽이 바라보는 듯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이윽고 각자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헤어졌습니다.
앞차에 의해 잠시 정지하여 두 차를 지켜보던 여인이 말했습니다.
“여보, 정말 아름답지 않아? 나도 저렇게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운전 시작할 거야.”
남편이 말했습니다.
“뭐가 아름다워, 저놈들 둘 다 음주 운전이라고.”

한 걸음만 물러서 봐도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즐겁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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