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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적 발의했던 '선수보호법'..1년 반 지나도록 시행 안된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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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문체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운동선수 보호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체육계 성폭행·폭행 근절을 촉구하고 있다. 당시 당적 기준으로 왼쪽부터 염동열 자유한국당, 김수민 바른미래당, 최경환 민주평화당,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스1]

지난해 1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문체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운동선수 보호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체육계 성폭행·폭행 근절을 촉구하고 있다. 당시 당적 기준으로 왼쪽부터 염동열 자유한국당, 김수민 바른미래당, 최경환 민주평화당,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스1]

“우리 국회 역시 깊은 자성에 기초해 체육계 폭행·성폭행을 근절하기 위한 입법 조치에 나설 것을 약속드린다.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조치가 아니라 체육 선진화를 위한 입법 조치는 국회 문체위 상임위 차원에서 주요 과제로 선정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다.”

지난해 1월 1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에서 낭독한 성명서 내용이다. 이날 의원들은 쇼트트랙 국가대표인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전 코치로부터 상습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한 데 대해 “더 이상 체육계의 폭행과 성폭행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들은 ‘운동선수 보호법’(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 발의 계획도 제시했다. ‘스포츠 윤리센터’를 설립해 인권 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고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스포츠 윤리센터’는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법안이 국회를 통과(올해 1월9일)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공포 후 6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는 부칙 조항이 붙어 있어 오는 8월 4일이 시행일이다. 그 사이 고(故) 최숙현 트라이애슬론 선수는 소속팀인 경주시청 감독과 팀 닥터로부터 상습적으로 구타와 가혹 행위를 당했고, 지난달 26일 오전 부산시청 직장운동부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최 선수 사건에 대해 “8월에 상설 독립기구인 ‘스포츠 윤리센터’ 출범을 앞두고 있어서 더욱 안타깝다”(박정희 민생당 대변인)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운동선수 보호법’은 원래 여야 의원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초 7개 부처에 대한 개각이 단행되면서 여야 대치가 급격히 심화됐다. ‘운동선수 보호법’을 상정할 예정이던 지난해 3월 27일 국회 문체위 전체회의는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을 둘러싼 대립으로 끝내 파행됐다. ‘운동선수 보호법’은 결국 지난해 7월에야 문체위를 통과했다.

그 이후 법사위 심사도 순조롭지 않았다. 이미 법사위는 패스트트랙으로 올린 공수처법 때문에 여야 충돌이 정점에 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공직선거법개정안까지 지난해 8월 말 법사위로 넘어오면서 법사위는 몇 달간 기능이 바비됐다. 여야 충돌의 후폭풍에 휘말려 해당 법안은 지난해 11월에야 법사위를 통과했고, 국회 본회의 문턱은 올해 1월이 돼서야 넘어설 수 있었다.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의 최숙현 선수가 지난달 26일 부산의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최 선수의 유족은 고인의 사망 후 고인이 전 소속팀 경주시청에서 모욕 및 폭행을 당하는 내용의 녹취록을 공개했다. (사진=고 최숙현 선수 가족 제공) [뉴시스]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의 최숙현 선수가 지난달 26일 부산의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최 선수의 유족은 고인의 사망 후 고인이 전 소속팀 경주시청에서 모욕 및 폭행을 당하는 내용의 녹취록을 공개했다. (사진=고 최숙현 선수 가족 제공) [뉴시스]

‘스포츠 윤리센터’ 발족이 늦어지는 사이에 최숙현 선수의 고통은 계속 커졌다. 최 선수는 지난 2월부터 사망 전날까지 4개월 넘는 기간, 국가인권위·검찰·경주시청·대한체육회·철인3종협회에 폭행과 폭언에 시달렸다고 진정서 등을 내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고 나선 곳은 없었다. 대한철인3종협회는 사건을 지난 2월에 인지했으나 “아무 일 없다”는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감독의 말만 듣고 사건을 덮었다.

다만 ‘스포츠 윤리센터’가 설치되더라도 유사한 사례를 방지하기에 역부족이란 지적도 있다. 현재 ‘운동선수 보호법’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를 ‘성폭력 방지·피해자 보호’가 아니라 ‘체육인 보호 시책 마련’으로 소극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포츠 윤리센터’는 조사 기능만 규정돼 있을 뿐 대한체육회 산하단체에 대한 강제 조사 권한이 없다. 일선 스포츠팀이나 협회가 조사를 거부하고 나설 경우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평창올림픽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 감독 출신인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은 1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가족이 간곡히 요청해주신 ‘최숙현법’을 조속히 제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피해사건의 신속처리, 피해자·가해자의 분리조치 및 피해자 임시 보호,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금지 등 구체적인 조항을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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