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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슬픈 금메달, 몬주익의 감동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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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스포츠로 행복한 대한민국

1920년 7월 13일, 건민(健民), 신민(新民), 저항을 이념으로 조선체육회가 창립됐다. 조선체육회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체육회가 1948년 그 뒤를 이었다. 2020년은 대한체육회 창립 100주년의 해다. 중앙일보는 지난 100년의 한국 스포츠를 돌아보고 앞으로 100년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스포츠로 행복한 대한민국’ 기획을 연재한다. 

고 손기정(오른쪽)과 황영조. [중앙포토]

고 손기정(오른쪽)과 황영조. [중앙포토]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 시상식.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월계수(실제로는 대왕참나무) 묘목으로 자신의 가슴팍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나라 잃은 조선 청년은 일본 국가를 들으며 승자의 미소 대신 슬픈 표정을 지었다.

①대한체육회 100년 최고의 두 장면 #손기정·황영조 56년 간격으로 쾌거 #“민족 혼 담긴 마라톤 다시 부활을”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몬주익 스타디움.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경기에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사람은 한국의 황영조(50)였다. 관중석에서 이를 지켜본 손기정은 눈물 흘렸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슬픈 표정을 지었던 그 날로부터 56년이 지난 같은 날이었다.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 최정동 기자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 최정동 기자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은 28년 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황 감독은 시상식 뒤에 금메달을 손기정(2002년 작고) 선생 목에 걸어드렸다. “울먹이시며 내가 죽기 전에 한국 선수가 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하셨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와 나치의 정권 선전 도구였다. 미국 등 일부 국가가 이를 반대해 ‘피플스 올림피아드’란 대체 대회를 열려고 했다. 대회 장소는 바르셀로나였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결국 무산됐지만, 몬주익 경기장은 그때 개축됐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사진 왼쪽),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사진 국제올림픽위원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사진 왼쪽),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사진 국제올림픽위원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결과는 더욱 극적이었다. 2위가 일본 모리시타 고이치, 3위가 독일 스테판 프라이강이었다. 황영조는 “대회 장소도 그렇지만, 시상대에 오른 메달리스트가 베를린 올림픽 개최국 선수, 그리고 한국과 일본 선수였다. 정말 묘했다”고 떠올렸다.

당시 레이스는 섭씨 28도의 무더운 날씨 속에 진행됐다. 코스도 평탄하지 았다. 기록보다 순위싸움이었다. 초반부터 선두 그룹에서 달린 황영조는 모리시타, 그리고 1991년 세계선수권 우승자 다니구치 히로미(8위)를 경계했다. 황영조는 “나는 당시 최연소 선수였다. 출전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15㎞ 구간에서는 물을 집지 못한 모리시타에게 내가 집어 건네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황영조는 40㎞ 지점까지 모리시타와 함께 달렸다. 지옥의 구간으로 꼽힌 몬주익 언덕을 넘어 내리막으로 접어드는 순간 스퍼트해 모리시타를 따돌렸다. 황영조는 “오르막에서 10번 정도 속도를 냈는데, 모리시타가 뒤처지지 않았다. 손기정 선생은 ‘저러다 둘 다 완주를 못 하겠네’라고 생각하셨다 하더라”고 전했다. 황영조는 “경기장 진입 후 뒤를 돌아보는데 모리시타가 있었다. 일본 선수에게 역전당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내 달린 황영조는 골인 뒤 그대로 쓰러졌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던 조선인에게 큰 힘이 됐다. 글을 모르는 이들도 올림픽과 마라톤, 그리고 손기정 이름은 알았다. 황영조의 금메달은 잊힐 뻔했던 역사를 일깨웠고, 국민에게 감동을 줬다. 황영조는 “한국은 바르셀로나에서 금 12개로 종합 7위에 올랐다. 1988년 서울 올림픽(금 12개, 4위) 때는 개최국이었다. 다른 나라 대회에서 거둔 성과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근래 한국 마라톤은 국제 경쟁력을 잃었다. 이봉주(보스턴 마라톤 우승) 은퇴 이후 세계와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황영조는 “마라톤이 생활체육으로는 인기지만, 엘리트 선수 경기력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도쿄 올림픽에서도 귀화 선수 에루페(한국명 오주한) 외에는 기대주가 없다. 민족혼이 담긴 종목인데…. 지도자로서도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이다. 한국 마라톤이 다시 (세계 속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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