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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인국의 퍼스펙티브

미·중이 자국 우선주의 고집하면 ‘킨들버거 함정’ 빠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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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코로나19와 글로벌 거버넌스 위기

지난해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미·중이 국제 협력에 등 돌리며 파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미·중이 국제 협력에 등 돌리며 파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는 형제라 불릴 만큼 유사하지만, 사스·메르스는 수백 명 단위의 사망자를 내는 데 그쳤다. 막내인 코로나19는 ‘바람기 많은’ 확장성 때문에 188개국에 1000만명 넘는 확진자와 5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며 세계를 얼어붙게 했다. 지난 5월 라마단 이후 이란·사우디아라비아에서 2차 코로나19 창궐 징후가 보이는 것을 신호탄으로 전 세계적 2차 대유행의 임박을 예상하는 전문가도 있다.

대공황 때 미국 보호무역 조치가 세계 교역 급랭시키며 #경제난 독일에 나치 정권 출현시켜 2차대전으로 이어져 #미·중이 자국 우선주의 내세워 글로벌 공공재 공급 안 하면 #극단주의 세력이 힘을 얻어 전 세계가 위험에 빠질 수 있어

백신 개발은 접종 후 가볍게 코로나에 감염시키면서도 심각한 증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확신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지난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치료제 개발의 주축인 약물 재창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극찬한 클로로퀸의 사용 허가가 취소되고, 아베 총리가 칭찬한 아비간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친 데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명확해진다. 천신만고 끝에 백신이 개발돼도 글로벌 차원의 집단 면역이 생기기 위해서는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진 만큼 세계 인구의 60%인 42억명 접종분의 백신을 제때 공급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대공황 경제난에 극단주의 득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백신이 개발되면 전 세계에 보급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나, 독일 백신 회사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 강화 보도가 나오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를 반박한 사례에서 보듯 백신 개발은 첨단과학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냉전 초기 우주 개발이 미·소 경쟁의 핵심이었듯 4차 산업혁명은 미·중 패권 경쟁의 중심이 됐고, 코로나 사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독자 개발 능력이 없는 국가들에 어느 나라의 백신이 공급되느냐를 두고 미·중 간 새로운 헤게모니 각축전이 예상된다.

코로나19 책임 공방도 미·중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코로나19의 미국인 희생자 12만명은 진주만(2403명)과 9·11 테러(2977명), 한국전·월남전(9만4794명) 희생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으로서는 상당한 정치적 압박 요인이 될 것이다.

지난 4월 조시 할리 상원의원이 중국에 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을 추궁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코로나바이러스 피해자를 위한 정의’법안을 제출했다. 만약 이 법안이 통과되고 이를 계기로 미국 코로나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중국을 상대로 천문학적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경우 미·중 관계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론 1976년 제정된 외국주권면제법에 따르면 중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법적 조치에는 한계가 있다. 이 법의 주목적이 전 세계에 진출한 미국 기업과 미국인의 재산 보호를 위한 상호주의적 견제 장치였다는 점은 여전히 정책적 고려 요인이 되겠으나, 그 면제 법안에도 예외가 있다. 2018년 워싱턴DC 연방법원이 오토 웜비어의 사망에 대한 북한의 책임을 인정해 웜비어 가족에게 북한이 5억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도 선례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중국에 대한 코로나 소송이 웜비어 사건과 다른 점은 중국이 자국 내 미국 자산에 대한 상호주의적 대응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의 일방적 조치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미국 법정에서 중국 정부·기업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시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2018년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손해배상 승소 판결과 이 판결의 강제집행 착수가 한·일 관계 악화의 뇌관이 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소송이 불러올 파장을 가늠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미·중 패권 경쟁과 맞물리는 상황을 보면서 1930년대 대공황과 그로 인한 비극적 교훈을 떠올리게 된다. 20세기 초 영국을 제치고 신흥 패권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당시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충분한 공공재를 제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1930년 스무트-홀리법을 제정해 수입품에 평균 47%에 달하는 고관세를 부과하여 세기적 보호무역전쟁을 촉발했다. 교역 상대국들도 즉각 보복관세로 대응했고, 3년도 안 돼 미국 수출입은 약 60%, 전 세계 교역은 25% 이상 급감했다.

대공황에 따른 경제난은 극단주의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경제난에 처했던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출현시켜 2차대전으로까지 이어지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마셜 플랜 설계자였던 경제학자 킨들버거는 1930년대 미국은 글로벌 공공재 공급에 크게 실패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제사회는 새로운 몸부림 절실

1933~45년 전례 없는 재임 동안 대공황의 참담함을 경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또 다른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유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으로 구성된 브레턴우즈 체제와 보호무역 퇴치를 위한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출범 등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는 국제협력 체제를 가동함으로써 전후 70년 동안 전례 없는 ‘평화와 성장의 시대’를 열었다.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중국이 새로운 패권세력으로 부상함으로써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투키디데스 함정’뿐 아니라, 미·중 모두 자국 우선주의에 사로잡혀 공공재 공급을 등한시할 경우 전 세계가 다시 ‘킨들버거 함정’에 빠질 위험을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 아래 미국이 글로벌 공공재를 포기하려는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나는 시점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내적으로 뉴딜정책, 대외적으로 세계적 위기에 걸맞은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을 구축해 평화와 공동 번영의 시대를 열었듯, 국제사회는 새로운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위기는 그 시금석이 될 것이다.

미·중의 글로벌 리더십 실종, 대공황의 비극 재현할 수 있어

‘킨들버거 함정’(Kindleberger Trap)은 조셉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소개한 개념이다. 그는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을 ‘국제 공공재를 공급할 리더십의 부재’에서 찾았던 미국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1910~2003)의 이론을 재조명했다. 마셜 플랜의 설계자였던 킨들버거는 『대공황의 세계 1929~1939』에서 대공황의 원인을 영국을 대체해 신흥 패권국이 된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글로벌 공공재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 발생한 글로벌 리더십 공백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1920년대 패권국이 된 미국이 고립주의와 무임승차를 고집한 결과 글로벌 시스템이 붕괴하고, 대공황과 유대인 대학살,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는 킨들버거의 주장은 패권 국가가 글로벌 공공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때 세계 평화가 유지된다고 보는 패권안정이론의 토대가 됐다. 나이 교수는 기존 패권국 미국과 부상하는 중국 모두 글로벌 공공재 공급자로서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은 2012년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아테네의 급부상에 대한 스파르타의 공포가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원인이었다고 설명한 데에서 유래했다. 앨리슨 교수는 『예정된 전쟁』에서 기존 지배 세력이 신흥 세력의 부상에 위협을 느낄 경우 무력 충돌이 발생할 수 있으며, 1500년 이후 16번의 세력 교체 중 12번이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앨리슨 교수는 미·중 관계를 투키디데스 함정의 프레임으로 분석하면서 기존 패권국 미국과 떠오르는 강대국 중국 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시사했다.

나이 교수는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너무 두려워할 때 생기는 투키디데스 함정도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중국이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지 못하고 무임승차를 추구함으로써 1930년대의 킨들버거 함정에 빠지는 역사적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인국 최종현학술원장·전 주유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