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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민주당 너무 오만…유신 때도 영원한 권력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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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해찬의 의회독주냐 의회독재냐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1933년 3월 총선에서 43.9%로 집권한 나치당이 전체주의 인종학살 정권이 되리라고 예측한 독일 국민은 거의 없었다. 대중의 환호 속에 민주주의 방식으로 들어선 권력의 타락과 변질을 어린이의 눈으로 그린 『아빠, 왜 히틀러한테 투표했어요?』(봄나무, 2017년)라는 역사 동화책이 있다. 여기서 주인공의 아빠는 “반드시 히틀러를 뽑아야 해. 히틀러만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니까. 그가 독일 국민 모두에게 일자리를 줄 거라니까”라고 엄마를 설득했다. 일자리와 민족의 영광에 고무된 사람들은 책이 불타고 야당이 해산되고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죽어 나가도 남의 일이라고 여겼다. 보통의 독일인이 일당 독재의 고통과 공포를 자기 문제로 경험하기 시작한 건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1940년 전후라고 한다. 독재는 이처럼 달콤하게 다가오곤 한다. 독일의 나치 세력은 집권 7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쓴맛이 느껴진 경우다.

독재는 달콤하게 다가와 비극 남겨 #민주적으로 집권 뒤 비민주적 통치 #여야간 타협의 절차를 밟아야 #“문 대통령 뭔가에 쫓기는듯 조급”

꼬마 주인공에겐 장애인 여동생이 있었는데 인종주의 정권이 유대인에 이어 집시, 장애인도 청소 대상으로 공격하자 집안에 비극이 찾아온다. 뒤늦게 괴물 권력의 실체를 알게 된 아빠는 후회를 하고, 아들은 왜 히틀러한테 투표했느냐고 절규하듯 묻는다.

2017년 4월 문재인 대선 후보의 승리가 굳어지자 당시 이해찬 민주당 선대위원장은 “보수세력을 궤멸시키고 20년 집권을 쭉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여야의 국회의원 수가 비슷비슷해 ‘보수 궤멸론’은 예민한 사람들에게만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2020년 6월 현재 상황이 달라졌다. 이해찬 집권당 대표가 국회 원구성 과정에서 30여년 민주화 역사에서 처음 보는 야당 무시 노선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후퇴하고 상처는 깊어간다. 2020년 4월 총선에서 50% 득표율(지역구)에 176석 공룡 의석이 된 민주당 정권의 힘자랑은 잔인할 정도다. 야당은 한순간에 풀잎처럼 짓밟혔다. 보수 야당이 권력에 의해 투명인간처럼 취급되는 것과 함께 보수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공론장의 집단 공격자들에 의해 2급 시민이나 3류 국민으로 손가락질받는 신세가 되었다.

집권당의 김태년 원내대표와 개원 협상을 진행했던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는 “김태년 뒤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이해찬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해찬 대표는 통합당을 없어져야 할 정당, 궤멸시켜야 할 정치 세력으로 보는 것 같았다. 선거의 힘으로는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읽혔다”고 말했다. 주호영은 “정권이 나라를 이렇게 끌고 가니 결국 정치는 나치당처럼, 경제는 베네수엘라처럼 되지 않겠나”라고 허탈해했다.

주호영의 김태년 체험기가 엄살만은 아닌 듯하다. 이해찬은 ‘국회 18개 상임위원장 싹쓸이’라는 민주화 시대 이전 체제로 회귀를 결정하면서 “3차 추경은 협상 대상이 아니고 양보할 일이 아니다. 통합당은 이 점을 유념하길 바란다(6월 22일 당 최고위원회의)”→ “지난 국회에선 민주당이 의석도 부족했고, 법사위를 통합당이 갖고 있어서 발목잡기가 통했지만 이번 국회에서 민주당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6월 26일 회의)”라고 지시·협박적인 말투를 사용했다. 원내 최다선 7선 의원이 정치의 힘을 보여주긴커녕 조자룡 헌칼 쓰듯 힘의 정치만 강조했다.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는 이해찬의 민주당이 박정희·전두환 독재의 의회 시스템으로 되돌아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문재인·이해찬의 권력 정치를 같은 평면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고 사회문화적 배경도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야당을 소멸시켜야 할 존재로 보는 궤멸적 정치관, 민주주의로 집권한 뒤 비민주적으로 통치하는 권력의 이중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양자의 공통점이 아주 없지도 않다.

한화갑

한화갑

문재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의 집권 세력이 이번 총선으로 힘이 세졌는데도 궤멸적 정치관을 고집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987년 민주화 이래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관용과 절제는 안 보이고 독점과 탐욕이 증가하는 현상은 권력의 위험 신호가 아닐 수 없다. 진보 진영에서 문재인·이해찬의 정치 선배이자 김대중 대통령 때 집권당 원내대표와 당대표를 차례로 지낸 한화갑 전 의원의 고언을 현 집권당이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와 1일 통화를 했다.

민주당이 그동안 야당 몫이었던 법사위원장을 가져갔다.
“민주당이 너무 오만하다. 이미 국회의 3분의 2 의석 가까이 가져가 무슨 법안이든 다 통과시킬 수 있는 구조가 됐는데 그렇게 야당에 인색하게 굴 이유가 뭔가. 우리의 세상이 왔다고 하고 싶은 건 다 하겠다는 모양이다. 그러면 안 돼. 부작용이 나올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때도 영원한 권력은 없지 않았나.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행정부가 임명한 유정회 의원까지 3분의 2가 넘었지만 그 권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3차 추경안을 처리하기 위해 원구성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추경안을 빨리 처리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대통령의 요구라 해서 여야가 시한을 정해놓고 몇일 몇시까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국민의 이해관계와 여야 간 타협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여당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것은 독재다. 협상 과정에서 필요하면 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한테 전화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문 대통령도 야당과 협치를 하겠다고 했으면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허용해야 했다. 3차 추경이 왜 꼭 7월 3일 안에 통과되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4월 말에 통과된 2차 추경 예산도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추경을 서두른 이유를 뭐라고 보나.
“조급하고 뭔가에 쫓기는 것 같다. 5년간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럴수록 대통령은 여유를 찾아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업적을 원한 건 사실이지만 할 수 있냐, 없냐를 따져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방향만 설정하고 실질은 차기 대통령한테 맡길 수밖에 없다는 여유를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당 원내대표의 현장 의견을 거의 100% 존중했다.”

나치 독재의 부작용이 독일 국민 개개인에게 체감되기까지 약 7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뒤늦게 폐해를 깨달았을 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영국과 소련, 미국을 상대로 세계 대전이 벌어지거나 준비되고 있어서 국민이 손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죽어봐야 저승 맛을 안다는 속담이 있다. 바야흐로 문재인 정권에서 이해찬의 의회 독주가 시작되었다. 좋다는 사람도 있고 나쁘다는 사람도 있다. 이해찬과 김태년의 의도대로 일하는 국회의 보람이 나타나면 다행이겠다. 만에 하나 그들의 선택이 의도와 달리 국회에서 일당 독재, 민주주의의 붕괴로 나타난다면 속수무책일 것이다. 저승 맛을 안다는 것은 죽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입법부 독립성’

박병석 국회의장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미래통합당이 불참한 가운데 상임위원장 선거안을 상정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병석 국회의장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미래통합당이 불참한 가운데 상임위원장 선거안을 상정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민주당의 ‘국회 18개 상임위원장 싹쓸이’ 프로그램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 이해찬 당대표, 김태년 원내대표, 그리고 박병석 국회의장 4인이다. 문 대통령은 협치에 필요한 정치적 시간은 고려하지 않고 3차 추경안 통과만 과도하게 압박했다. 이해찬 대표는 협상에 의한 정치보다 야당의 궤멸적 붕괴가 목표인 사람처럼 행동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박병석 의장은 어떤 문제가 있었던가.

박병석 국회의장은 헌법상 행정부를 견제·감시하는 입법부 수장이라는 위상의 엄중함을 잊은 듯했다. 문 대통령이 “3차 추경을 기다리는 국민과 기업들의 절실한 요구에 국회가 응답해 달라”고 한 데 대해 박 의장은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며 국회 상임위원장 싹쓸이 회의를 진행했다.

박 의장은 또 여야 중재안을 제시하면서 2022년 봄에 뽑게 될 21대 국회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차기 대통령 소속당 의원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이 제안은 주호영 야당 원내대표가 거부했다. 박 의장의 아이디어는 3권분립이 엄연한데 입법부의 구성을 행정부 수반에 따라 종속시키자는 반헌법적 발상이다. 여야 협의 없는 직권 상정을 하지 않겠다며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에 맞섰던 고 이만섭 국회의장의 입법부 독립 정신을 박 의장이 되새겼으면 한다. (이만섭, 『정치는 가슴으로』2014년)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