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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한 자루 만드는 데 150공정...에어컨 시대, 김동식 장인 '63년 고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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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한지에 금빛의 황칠을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한 멋이 올라온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한지에 금빛의 황칠을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한 멋이 올라온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씨에는 한 줌 바람이 귀하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는 아마도 부채가 바람을 만드는 유일한 도구였을 것이다.

신분에 따라 부챗살 숫자도 달랐던 조선 #대나무 겉대 맞붙인 '합죽선'은 몇 백년도 보존 #대 속대만 사용한 일본·중국 부채보다 정교함 #영화 '군도' 속 강동원의 부채도 김 장인의 작품

우리나라 부채는 형태상 크고 둥근 태극선 모양의 ‘방구부채’와 접고 펼 수 있는 ‘접(摺) 부채’로 나뉜다. 그 중 접부채인 합죽선(合竹扇)은 왕 대나무의 겉대를 맞붙여서 만든다. 대나무 속대만 사용하는 중국·일본의 ‘접선’보다 튼튼해서 고려시대부터 나전, 금속, 칠, 옥공예 등과 접목돼 발전해왔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부챗살 수에도 제한을 뒀다. 왕실 직계만이 부챗살이 50개인 ‘오십살백접선’을 쓸 수 있었고 사대부는 사십선, 이하 중인과 상민은 그보다 살이 적은 부채를 사용할 수 있었다.

4대째 합죽선을 만들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장인.

4대째 합죽선을 만들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장인.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77세) 장인은 전주에서 4대째 합죽선을 만들고 있다. 14살이던 1956년, 합죽선을 가업으로 이어오던 외조부 라학천에게 부채 만들기를 배우면서다. 외조부는 고종에게 합죽선을 진상할 만큼 뛰어난 명인이었지만, 외가 쪽으로는 맥이 끊기고 현재 김동식 장인이 63년째 그 맥을 잇고 있다.
“합죽선 하나를 만들려면 최소 150번은 손이 가야하고 시간도 1주일 이상 걸리죠.”
조선시대에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선자청을 만들고 2부 6방의 관청 장인들이 분업으로 부채를 만들었다. 골선부 초조방(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내는 곳), 정련방(대나무를 붙여 부채 형태를 만드는 곳), 수장부 낙죽방(속살과 겉대에 박쥐·매화 등을 새겨 장식을 하는 곳), 광방(대나무를 매끄럽게 광내는 곳), 도배방(부챗살에 미리 접어놓은 한지를 붙이는 곳), 사북방(장식용 고리로 부채 머리를 고정한 후 최종 마무리를 하는 곳) 등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공정을 김동식 장인이 혼자 한다.
“사라져 가는 기술이기 때문에 내가 안 지키면 아예 없어져 버리잖아요.”
합죽선은 좋은 대나무를 구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대 껍질의 표면이 깔끔하고 윤기가 나야 상품이죠. 고급 합죽선을 만들려면 추미(대나무 마디 사이) 길이가 48cm는 돼야 하는데 그런 대나무를 만나려면 몇 년씩 걸리기도 하죠.”

김동식 장인이 대나무를 다듬는 모습. 대나무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야 한다.

김동식 장인이 대나무를 다듬는 모습. 대나무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야 한다.

김동식 선자장이 사용하는 도구들. 이 중에는 부채 만드는 기술을 알려준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것도 있다. 시간을 따져보면 족히 100년 넘게 사용한 도구들이다.

김동식 선자장이 사용하는 도구들. 이 중에는 부채 만드는 기술을 알려준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것도 있다. 시간을 따져보면 족히 100년 넘게 사용한 도구들이다.

초록빛이 도는 겉껍질을 잘라서 양잿물에 30~40분 간 삶아 말리면 노란 색이 드러난다. 다음부터가 핵심 과정이다. 끓는 물에 불린 대나무를 0.3mm 두께로 빛이 투과될 만큼 얇게 속대를 깎아내는 일이다. 사십선을 만들려면 양쪽 변죽(부채의 단단한 겉)을 제외하고 부챗살 76조각을 맞붙여야 한다. 그렇게 만든 부채 두께가 2.9cm 정도 돼야하니 사이사이에 들어간 부챗살은 얼마나 얇을까.
“일본과 중국의 부채 기술자들이 배워보겠다고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다들 ‘이건 쉽게 따라할 일이 아니다’라며 그냥 돌아갔죠.”
대나무 가시는 살에 한 번 박히면 찾기도 빼기도 힘들단다. 김 장인의 손가락 끝이 퉁퉁 부어 있는 이유다.
대나무 속껍질을 다 깎아내고 겉껍질 두 장씩을 붙일 때 풀은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든 ‘어교’와 동물 가죽, 힘줄, 뼈를 고아 만든 ‘아교’를 섞어 사용한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변죽을 나전칠기로 장식하고, 부챗살에도 빨간 주칠을 했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변죽을 나전칠기로 장식하고, 부챗살에도 빨간 주칠을 했다.

“대나무 속살은 쉽게 망가지지만 합죽선은 튼튼한 겉대 두 개를 포갰기 때문에 오래 사용 할 수 있고, 탄력도 좋아서 바람을 더 시원하게 몰고 오죠.”
풀로 붙인 부챗살을 단단히 묶어 일주일 정도 말린 다음, 손잡이 부분인 ‘등’으로 사용할 재료를 깎고 다듬는다. 부챗살에 풀을 입힌 후 미리 재단해서 접어놓은 한지를 붙이고, 손잡이에 장식인 사복을 박아야 합죽선 한 자루가 겨우 완성된다. 오로지 전통방식 그대로 수작업으로만 이뤄진 공정들이다. 대나무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에 기계사용은 꿈도 꾸지 못한다.
김 장인은 기능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중시한다. 합죽선은 선이 살아 있도록 살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채 등과 변죽에 어떤 문양을 새기는지, 어떤 재료를 썼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미학이 표현된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부채 끝에 다는 매듭장식을 '선추'라고 하는데 이 부채는 특이하게 선추 부분에 나침반을 함께 달았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부채 끝에 다는 매듭장식을 '선추'라고 하는데 이 부채는 특이하게 선추 부분에 나침반을 함께 달았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풍류와 멋은 바로 이 합죽선을 얼마나 사치스럽게 꾸미느냐로 판가름됐죠.”
합죽선 ‘등’은 흑단나무, 먹감나무, 박달나무 등을 사용하거나 우족(소뼈) 또는 상아를 사용한다. 그런데 요즘 상아는 아예 못 구하고, 우족도 우시장 상인들이 작게 뼈를 조각내서 팔기 때문에 역시 구하기 쉽지 않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부채의 손잡이 부분인 '등'과 양쪽의 단단한 겉 껍질인 '변죽'을 어떤 소재로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멋이 드러난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부채의 손잡이 부분인 '등'과 양쪽의 단단한 겉 껍질인 '변죽'을 어떤 소재로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멋이 드러난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거북이 등껍질을 얇게 떠서 변죽을 장식한 백접선.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거북이 등껍질을 얇게 떠서 변죽을 장식한 백접선.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임금과 왕비만 사용할 수 있었던 동그란 '윤선'을 개인용으로 작게 만든 것이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임금과 왕비만 사용할 수 있었던 동그란 '윤선'을 개인용으로 작게 만든 것이다.

변죽도 재료가 다양하다. 거북이 등껍질을 얇게 떠서 붙이거나, 나전을 붙여 옻칠 또는 주칠(붉은 옻칠)로 마무리하는 등 화려함에 끝이 없다. 부챗살에 한지대신 비단을 붙인 ‘비단선’, 임금과 왕비가 사용했던 동그란 ‘윤선’도 있다. 한지만 붙인 게 ‘백선’인데 종이에 금빛의 황칠을 하면 시간이 갈수록 더 깊고 은은한 빛을 띠게 된다. 황칠액 작은 병 하나가 400~500만원이니 부채 한 개에 15만~16만원씩 사용되는 비싼 재료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부챗살에 한지 대신 비단을 붙인 '비단선'. 부챗살 하나마다 새겨진 박쥐무늬와 꽃 모양도 일일이 불도장으로 직접 찍은 것이다.

'합죽선' 장인 김동식 선자장의 작품. 부챗살에 한지 대신 비단을 붙인 '비단선'. 부챗살 하나마다 새겨진 박쥐무늬와 꽃 모양도 일일이 불도장으로 직접 찍은 것이다.

영화 ‘군도’에서 주인공인 배우 강동원이 사용했던 합죽선도 김 장인이 만든 것이다.
“촬영에 꼭 필요하다고 해서 빌려줬더니 망가져서 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영화를 보니 배우가 그걸 들고 싸움도 하더라고요. 나한테는 작품인데 가볍게 대한 게 아쉽더라고요.”
김 장인은 “이왕 사는 부채라면 좋은 걸 사라”고 했다. 손때가 묻을수록 더 멋있고 사용할 때도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 부채를 사서 쓰레기를 양산할 필요가 없어요. 멋지게 살려면 멋스러운 소품도 필요하잖아요. 만졌을 때 기분 좋고, 펼쳤을 때 어디선가 기분 좋은 바람을 몰고 와 줄 것 같은 부채가 합죽선이죠.”
전주=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솔루나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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