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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문수의 미래를 묻다

스마트폰·반도체 강국 코리아, ‘디지털 한국 화폐’의 세계화를 꿈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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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포스트 달러 시대 

김문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경영대학원 부총장

김문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경영대학원 부총장

지폐와 동전의 종말은 올 것인가. 디지털 화폐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전화기가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화폐가 디지털로 바뀌면 또 한 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 화폐 #유럽·일본 손잡고 기술 공동 개발 #달러 뒤 이을 ‘통화 패권’ 노려 #한국은행도 발행 준비 본격 시동

디지털 화폐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제일 유력한 건 스마트폰을 마치 지갑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돈이 들어오고, 스마트폰을 기기에 태그해 지불하는 방식이다. 무슨 무슨 ‘페이’를 많이 쓰는 요즘 소비자들은 “다른 게 뭐냐”고 느낄 수도 있다.

대표적인 차이는 화폐를 특정 용도에만 쓸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학생이 용돈 받아 담배 사고 디지털 화폐를 태그하면 “삑! 안됩니다”라는 반응이 나오도록 부모가 제한을 걸 수 있다. 내가 기부한 돈을 약속된 목적에만 사용하도록 조건을 붙여 기부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당 수익을 못 쓰게 하려면 지금은 계좌 전체를 동결해야 하지만, 디지털 화폐가 통용되면 부당 수익에 해당하는 부분만 쓰지 못하도록 묶어놓고 자금 이동 내역을 정밀하게 추적할 수도 있다.

중국, 스타벅스와 디지털 화폐 시범사업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한국은행과 같은 국가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를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라고 한다. 이는 중국이 가장 앞서 있다. 중국 베이징 남서쪽의 슝안(雄安) 신도시에서 진행할 디지털 화폐 시범사업에는 스타벅스·맥도널드가 참여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의 디지털 화폐 연구도 빨라지고 있다. 이유는 방역이다. 지폐가 사람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며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코로나19가 심각한 지역의 지폐를 대량 회수해 소독하고 심지어는 소각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의 가상 화폐 ‘리브라’와 중국 ‘디지털 위안화’ 중 어느 쪽이 먼저 실용화 될까.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다. [로이터=연합뉴스]

페이스북의 가상 화폐 ‘리브라’와 중국 ‘디지털 위안화’ 중 어느 쪽이 먼저 실용화 될까.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방역은 표면적 이유다. 중국은 이미 코로나19가 발생하기 한참 전인 2014년부터 디지털 화폐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왔다. 중국 정부와 100여 개 은행이 함께 운영하는 중국전자은행망(CEBNET)은 2017년 연구자료를 통해 “중앙은행의 디지털 통화는 경제 시스템 유동성을 증가시키고, 거래 비용을 감소시키며, 자금 흐름 추적과 세탁 감독에 용이하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 공산당 제19차 보고서를 인용하며 “디지털 경제 신산업의 번영 개발을 위해 현대적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금융이 경제의 핵심이므로 디지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디지털 금융이 필요하고, 따라서 법정 디지털 화폐가 필수다”라고 역설했다. 2019년에 페이스북이 자체 디지털 화폐 리브라(libra) 프로젝트를 선포하자,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부르면 나올 수 있는 단계”라고 응답했다.

‘일본 + 유럽 디지털 화폐 블록’

일본도 착실히 디지털 화폐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일본은행은 2015년부터 디지털 화폐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자료를 공개했다. 일본은행은 특히 2017년부터 유럽 중앙은행과 함께 ‘분산 장부 기술’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발간하는 ‘프로젝트 스텔라(Project Stella)’를 운영했다. 분산 장부 기술이란 것을 활용해 일본과 유럽의 디지털 화폐가 호환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면 일종의 배타적인 경제 블록이 형성된다. 일본과 유럽이 합친 정도의 경제 규모라면 디지털 통화 주도권을 쥐는 것도 가능하다. 미국이 달러를 통해 거머쥔 것과 비슷한 경제 권력을 ‘일본 + 유럽’이라는 디지털 화폐 블록이 가져가겠다는 심산이다. 일본과 유럽은 선제권을 확보한 뒤 어떻게 여기에 미국을 초청해 힘을 더 키울 것인지 내심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여기엔 중국을 끼워주지 않은 공산이 크다. 일본이 주도권을 가진 한, 한국의 참여도 쉽지 않아 보인다.

달러 패권 국가인 미국 역시 디지털 화폐 시대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레이얼 브레이너드 이사는 지난해 10월 스위스 바젤의 국제결제은행(BIS)에서 열린 ‘디지털 시대 화폐의 미래(The Future of Money in the Digital Age)’ 콘퍼런스에서 “돈이 있는 곳이라면 그 돈이 어떠한 형태를 띠더라도 지난 100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미국이 주도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한국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한국은 금융 인프라가 잘 돼 있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할 필요는 없으나 연구는 한다”는 애매한 입장을 고수했으나,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디지털 화폐 발행 준비 작업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화폐 발행에 필요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디지털 화폐 법률자문단’을 출범했다.

한국, 발달한 스마트폰·메신저 활용이 관건

디지털 화폐 시대가 열리면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될까. 결론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황금 기회를 맞을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은 경제가 성장했어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축통화’를 보유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화폐 시대에는 가능성이 엿보인다. 중국전자은행망도 “디지털 화폐 시대가 되면 위안화가 더욱 국제화될 수 있다”고 밝혀 왔다.

특히 한국은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리더십을 쥐고 있다. 단지 스마트폰뿐 아니라 그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애플과 화웨이도 정작 반도체의 상당량을 한국에 의존하는 현실이다. 더구나 디지털 화폐는 스마트폰에서 작동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하고, 스마트폰 안에 디지털 화폐 지갑을 깔아놓는 쪽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한국이 유리한 이유는 또 있다. 카카오뱅크는 오프라인 지점 하나 없지만, 모바일에서는 시중 은행을 추월했다. 전 국민 메신저인 카카오톡의 힘이다. 카톡을 무상시로 쓰던 국민이 자연스레 카카오뱅크를 사용하게 됐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비슷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당장 일본부터 네이버 라인을 쓰고 있다. 카카오와 네이버 라인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주요국들을 점유해 ‘글로벌 메신저 플랫폼’이 됐다. 한국과 카카오톡·네이버 라인을 쓰는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페이스북이나 위챗을 사용한다. 전 세계에서 자국이 개발한 메신저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지 않다.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아직도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선호하는 국가다. 일본 국민에게는 ‘예금 봉쇄’라는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있다. 일본 정부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급격히 높아진 국가 부채를 메우기 위해 국민의 부동산과 재산에 90%에 가까운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일본이 유럽과 공동으로 디지털 화폐 블록 구축을 추진하고 있지만, 지금도 현금을 선호하는 일본 국민이 디지털 화폐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국민의 경제 활동 감시하는 ‘빅 브라더’ 나타날까

한국은행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경제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출현이다. 디지털 화폐는 특정 목적으로만 쓰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게 가능하다. 추적도 쉽다. 예를 들어 재난 지원금을 특정 기간 안에, 특정 업소에서만 쓸 수 있도록 하는 건 디지털 화폐에서 아주 쉬운 일이다. 나아가 재난지원금으로 결제받은 식당 주인이 그 금액을 다시 한정된 용처에, 한정된 기간 동안 쓰도록 하는 것 역시 디지털 화폐로는 실현 가능하다. 재난지원금이 빠른 속도로 돌고 또 돌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경제 살리기 효과를 높이기 위해 돈이 도는 속도(통화 승수)를 최대치로 올리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이렇게 디지털 화폐에 꼬리표를 붙여 얼른 사용하도록 만들어 놓는 게 상상 속의 얘기만은 아닐 수 있다. 심지어 지금처럼 국회가 추가경정예산안을 심의하고 나라가 빚을 내 긴급재난지원금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재난지원금 자체를 한국은행이 직접 발행해 국민 지갑에 곧바로 꽂아 줄 수도 있다.

결과는 ‘중앙 경제 통제 권력’의 강화다. 한국은행의 ‘디지털 화폐 보고서’는 “디지털 화폐 시대가 개막되면 시중 은행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중앙은행의 힘이 더욱 세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디지털 화폐 시대가 열리면 정부는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통화 승수를 올리겠다며 화폐 흐름과 관련한 빅데이터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다양한 정책을 실행할 수도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화폐를 통한 국가의 중앙 지휘와 개인의 정보 보호가 충돌한다.

그래서 그동안 한국은행은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코로나19 사태는 한국은행의 입장도 바꾸고 있다. 정부가 외치고 기다리던 4차 산업혁명은 코로나19로 인해 불이 붙었다.

김문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경영대학원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