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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종남의 퍼스펙티브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 선진국 도약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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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K방역 이후 한국의 과제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 새마을부녀회연합회가 금 모으기의 시초가 된 애국 가락지 모으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 새마을부녀회연합회가 금 모으기의 시초가 된 애국 가락지 모으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필자는 미셸 캉드쉬 IMF(국제통화기금) 총재의 방한 일정을 밀착 마크하며 친한 사이가 됐다. 그는 외환 위기가 한국에는 ‘가면을 쓴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리나라는 그의 말대로 위기를 잘 이겨냈고 경쟁력이 더 강해진 나라로 거듭났다.

97년 외환위기 때 고통 감내해 더 강한 나라 만들었듯 #코로나19 위기도 국가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어 #노동시장 경직성 해소하고 지나친 CEO 부담 완화해 #코로나19 충격을 ‘가면을 쓴 축복’ 계기로 만들자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의 일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누구든 태어나서 이제껏 겪어보지 않은 위기를 맞은 셈이다.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 경제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은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시스템이었다. 코로나19는 이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다.

91년 구소련 붕괴로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간 대결은 시장경제의 압승으로 끝났다. 시장경제란 사고자 하는 수요와 팔고자 하는 공급이 흥정해서 가격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애덤 스미스는『국부론』에서 어떤 정부 관리의 계획보다 시장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역할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 결과적으로 시장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주장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수요와 공급이다. 하지만 대량생산시대 이후부터 공급보다 수요가 더 중요해졌다. 수요만 있다면 공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세계 각국은 수요를 늘릴 정책 구상에 부심했다.

코로나19는 공급 애로까지 가중시켜

지난달 6일 서울 광화문역에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는 시민들. [뉴시스]

지난달 6일 서울 광화문역에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는 시민들. [뉴시스]

2008년 세계적 경기 침체기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벤 버냉키 의장이 취한 금리 인하나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QE) 조치도 수요를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버냉키 의장은 금리 인하로 기업의 이자 비용을 절감시켜 투자를 유인하고자 했다.

양적 완화라는 신조어도 결국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수요를 늘리려는 조치에 다름 아니다. 경제 활동에 필요한 통화 공급과 화폐 가치 안정이라는 중앙은행 본연의 역할 중 화폐 가치 안정은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수요를 늘리기 위한 또 하나의 정책 수단으로 재정이 있다. 민간 소비나 기업의 투자가 부족한 경우 정부는 적자 재정을 편성하기도 한다. 각국은 수요 부족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라는 수단을 쓴다.

올해 상반기에는 코로나19로 경제 활동이 크게 움츠러들어 수요가 급격히 감소했다. 수요 감소만으로도 힘겨운데 생산 활동마저 위축됐다. 전문 용어를 빌리면 세계 공급망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세계 각국은 ‘무역의 이득’ 이론에 따라 경쟁력 있는 분야에 특화해 분업 생산하는 자유무역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 국가 간 무역 분쟁으로 자유무역체제에 균열이 생길 때도 있다. 2019년 7월 일본이 취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장치에 사용되는 불화수소의 수출 제한조치가 그 예다.코로나19로 인해 부품 생산 공장의 가동에 문제가 생기면 그 부품을 사용하는 제품의 생산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자동차 타이어의 생산이 원활하지 않으면 자동차 출고에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제까지 경제 문제의 핵심인 수요 부족에 더해서 이번 코로나19는 공급 애로까지 이중고(二重苦)를 몰고 왔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미국 우선주의’는 세계가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비중이 64%(2019년 기준)로 세계 3위인 우리나라로서는 견디기 힘든 도전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60년 동안 단 두 차례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다음 해인 1980년에 -1.6%, 외환 위기의 여파로 98년에 -5.1%였다. 2009년의 세계 경기 침체기에도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0.8%)을 했다. 이번 코로나19 충격을 보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혹독한 마이너스 성장을 겪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지난 2월 대구에서 코로나 31호 확진 환자가 발생한 뒤 감염자가 폭증하자 세계 각국은 한국인에 대한 입국 제한 조처를 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 후 우리나라는 코로나 방역 모범 국가가 돼 ‘살기 안전한 나라’ 기준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한국의 다음 과제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 기준으로도 선진국 그룹에 합류하는 일이다. 수요 부족 문제는 정부나 중앙은행의 정책으로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공급망 애로를 타개하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기업이 해야 할 과제다.

필자는 다국적기업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자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장래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기업 활동에 대한 지나친 규제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토로한다.

기업 잘못 책임을 모두 CEO에 물어

일단 채용한 근로자는 설사 경영이 악화하더라도 내보내기가 매우 어려운 노동시장의 경직성에 대한 호소를 가장 많이 듣는다. 기업 입장에서 해고가 힘든 만큼 애초부터 채용을 꺼리게 된다. 아울러 기업의 모든 잘못은 크건 작건 CEO에게 책임을 묻는 CEO 리스크에 대한 하소연도 많이 듣는다.

이번 코로나19 충격을 97년 외환 위기 때처럼 ‘가면을 쓴 축복’의 계기로 만들어 우리나라가 ‘살기 안전한 나라’와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두 기준 모두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를 기대한다.

디지털 기반 교육 인프라 투자 획기적으로 늘리자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 극복을 위해 정부는 확장적 재정정책 기조를 취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금리 인하로 이에 동참하는 모습이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대처 과정에서 당시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나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회의 의장 폴 로머는 ‘경제 위기 때 재정정책의 승수가 1보다 크다’는 점을 규명함으로써 주요국이 확장적 재정정책을 취하는 근거가 됐다. 하지만 이들이 정부 지출과 국가 부채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만 한 것은 아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재정 지출의 여력을 만들어 놓으라’는 충고도 곁들였다.

반면 ‘리카르도의 등가정리’에 따르면 개인은 정부 지출 증가가 미래 세(稅) 부담 증가로 이어질 것을 예상하고 소비를 늘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재정의 경기 부양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 따라서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경우 내용을 신중하게 점검해서 경제 활성화에 미치는 효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현금 지급과 더불어 냉장고·세탁기 등 내구재 구매에 세제상 감면 혜택을 주는 방안도 병행해서 고려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부자에게까지 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는 비판도 줄일 수 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학생들은 컴퓨터를 통한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고, 직장인들은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고 있다. 비대면 수업이나 재택근무는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 사회의 새로운 풍속도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4차 산업혁명시대 도래로 미래는 물리적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할 전망이다. 또 이제는 우리 삶의 현장 전체가 배움터가 되는 시대가 됐다.

이러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디지털 기반의 교육 인프라 투자에 획기적으로 재정 지출을 늘려 이번 기회에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기업의 주가가 비슷한 수준의 외국 기업 주가에 비해 낮게 형성돼 있는 현상)를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바꾸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오종남 SC제일은행 이사회 의장·전 IMF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