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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브 “10배 축적된 에너지 갖춰야 파괴적 혁신 승자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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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호 16면

[디지털 걸리버여행기] 패러다임의 전환 <2> SAP

혁신가에게 새로운 카테고리의 기술과 제품, 사업을 창조하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카테고리에는 생명주기가 있다. 기존 카테고리가 제공하는 가치가 감소하거나 가치 대비 비용이 과다해질 때 새로운 카테고리가 나타나 시장에 파괴적 혁신을 일으킨다.

빅데이터·AI 등 준비된 경쟁력 #선도 기업들 플랫폼 신속 재편 #미국~서울~독일 릴레이 개발 #SAP, 인메모리 플랫폼 첫 공개 #실시간 오류 잡는 ‘비빔밥 테스트’ #자동 SW 테스트 클라우드 혁신

인텔을 세계 제1의 반도체기업 반석에 올려놓은 공동창업자 앤디 그로브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에서 파괴적 혁신을 위한 ‘10배의 법칙’을 이야기했다. 혁신 기술, 혁신 인재, 혁신 사업 모델 등에서 10배의 힘을 모아야 현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세력을 이길 수 있다는 법칙이다.

경쟁사 오라클 “그럴 리가 없다” 충격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은 디지털 대전환에 걸림돌이 되었던 레거시 사고와 관행을 일시에 허문 지각 변동이다. 원격 협업이 일상화되면서 빅데이터, 인공지능, 클라우드 경쟁을 선도하는 기업들은 이 지각 변동을 이용해 발 빠르게 플랫폼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준비된 자가 새로운 세계의 가치에 맞는 카테고리의 제품과 사업에서 앞서 나가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자가 된다.

그래픽=전유리 jeon.yuri1@joins.com

그래픽=전유리 jeon.yuri1@joins.com

1972년 5명의 SAP 창업자가 ‘시스템(S), 애플리케이션(A), 프로덕트(P) 데이터 프로세싱’을 회사 이름으로 걸고 세계 최초의 소프트웨어(SW) 회사를 창업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SAP가 시작한 온-프레미스(On-Premise) SW 사업 모델은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고객이 자체 전산 인프라를 구축하고 SW 라이선스를 구매해 유지하는 모델이다.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MS)도 이 모델로 성장했다. SW 회사는 고객으로부터 판매금액의 일정 비율을 매년 유지보수 비용으로 받는다. SAP, 오라클의 경우 22%다. SW 회사의 탄탄한 유지보수 매출은 안정적 경영을 가능하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혁신을 힘들게 하는 독이 될 수 있다.

온-프레미스 사업과 대비되는 클라우드 SW 서비스 사업의 선구자는 세일즈포스닷컴의 마크 베니오프다. 오라클 회장 래리 엘리슨이 총애하던 세일즈맨이던 그는 SW의 구입과 사용이 아마존에서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는 것만큼 쉬워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1999년 고객관리 SW 서비스 회사를 창업했다.   래리와 미국 하원 의장 낸시 펠로시의 남편 폴도 초기 투자를 했다. 클라우드 SW 서비스를 고객이 필요할 때 사용료를 내고 쓰는 사업 모델이다. SW 사용이 늘거나 줄면 탄력적으로 매달 내는 사용료를 조정하면 된다. 자체 전산 인프라 투자가 필요 없다. 긴 SW 도입 기간, IT 인력 확보와 유지에 대한 부담도 없다. 신생 기업들은 당연히 클라우드 SW 서비스를 채택한다.

세일즈포스닷컴은 최근 급성장해 시가총액이 오라클 대비 85%, SAP 대비 95%까지 성장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최고층 건물이 45년 만에 세일즈포스닷컴 빌딩으로 바뀌었다.

2004년 오라클에 인사관리 SW 기업 피플소프트를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빼앗긴 창업자 데이빗 두필드는 그다음 해 워크데이를 창업해 2012년 나스닥에 상장했다. 워크데이는 인사관리, 재무관리 클라우드 SW 서비스 회사다. 며칠 전 MS는 워크데이를 자사의 애저 클라우드에 통합해 팬데믹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MS 팀즈에서 쓸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헌 집을 주고 새 집을 지어 전화위복한 모양이 됐다.

“SAP에 태양은 지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실리콘밸리로 릴레이를 하며 우리는 24시간 HANA를 개발한다.”

SAP의 공동창업자 하소 플래터너 회장은 2010년 5월 HANA 플랫폼을 세상에 처음 공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SAP는 한국과 독일의 공동협업을 위해 한국연구소에 약 3억원의 비용을 들여 시스코의 최고급 화상회의시스템 텔레프레전스를 설치했다. SAP 본사 1호관에는 모든 회의실이 이 화상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층이 있었다. SW 인재가 풍부한 미국 서부의 회사들과 달리 독일의 SAP는 우수 인재가 있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연구소와 사업 조직을 만드는 전략을 택했기 때문이다.

하소의 발언 이전에 당시 한 언론이 SAP의 인메모리 플랫폼 출시 소문에 대한 오라클 회장 래리 엘리슨의 의견을 보도했다. “인메모리 기술은 오라클이 선도한다, 이 기술은 SAP 팔로 알토에 있는 몇 명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SAP HANA 개발팀의 주력이 한국과 독일에 있었던 것을 모른 래리는 이 고난도의 SW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인재는 미국 서부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래리가 언급한 오라클의 인메모리 기술은 2005년 인수한 타임스텐(TimesTen)이다. SAP는 오라클이 이 회사 인수를 발표하자마자 비밀리에 나의 벤처 인수를 시작했다. 타임스텐은 앤디 그로브의 10배의 법칙을 따라 오라클 10배 성능을 목표로 HP 연구진이 창업한 회사다. 창업자는 1992년 내가 서울대 부임 이전 근무한 HP연구소의 보스 니이멧 박사였다. 하지만 타임스텐은 10배의 우위를 보여 주지 못했다. 독자 생존이 어렵게 되자 오라클에 흡수됐다.

SAP HANA의 24시간 연구개발을 위해 한국과 독일팀은 화상회의뿐만 아니라 상호 방문 대면워크샵을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또한 소통능력이 우수한 엔지니어들을 교차 파견했다. 독일과의 시차가 문제가 되지 않도록 공동책임자인 나도 새벽 2, 3시까지 깨어 일했다.

글로벌 혁신기업들의 성장

글로벌 혁신기업들의 성장

한국과 독일의 개발자가 새로운 코드를 생성하거나 변경할 때마다 실시간으로 오류를 걸러내는 대규모 자동 SW 테스트 클라우드를 구축했다. 여러 테스트를 섞어 극한 상황을 만들어 SW 안정성을 시험하는 테스트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비빔밥 테스트’가 됐다. 한국에서 비빔밥을 먹어 본 독일 엔지니어들은 이 개념을 금방 이해했다.

SAP는 2013년 8월 자체 ERP 데이터베이스를 SAP HANA로 바꾸는 작업을 단행했다. 한국과 독일에서 24시간 대응 태스크 포스가 만들어졌다.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의 직원이 사용하는 SAP ERP에 문제가 생기면 SAP의 글로벌 비즈니스가 멈추게 된다. 하지만 SAP 스스로 HANA를 ERP에 쓰지 않는다면 어떤 고객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작업은 패러다임 전환의 마지막 고행이었다.

HANA 개발 덕, 시총 200조 유럽 제1기업

2013년 여름이 끝날 무렵 HANA 기반 SAP ERP는 안정화가 됐다. 2005년 8월 하소 플래터너 SAP 공동창업자를 처음 만나 나누었던 인메모리 엔터프라이즈 플랫폼의 꿈도 거의 다 이루었다. 이제 망치로 두들기는 일만 남았다.

꿈꾸던 나의 베이비가 세상에 태어났다. 하소와 동료들의 베이비이기도 하다. MS, IBM, 오라클이 우리의 추종자가 됐다. SAP는 HANA 때문에 새로 탄생한 혁신 기업이 되었다. 하향하던 주가는 변곡점을 찍고 4배 가까이 올라 시가총액 200조의 유럽 제1의 회사가 됐다.

2013년 SAP ERP를 HANA와 통합하기 위해 바쁜 때에 마이크로소프트연구소(MSR)의 데이터 플랫폼 연구책임자인 수라짓 차우드리 박사로부터 7월에 시애틀 본사에서 개최되는 연례 회의에 초청하는 e-메일이 왔다. 그는 스탠퍼드 유학시절 한 사무실을 썼던 친구다.

“내가 MS와 경쟁 관계에 있는 SAP의 HANA를 만든 주역인데 가도 괜찮아?”

“괜찮아, 교수들을 초청하는 학술적 모임이야. 와서 자극을 좀 줘.”

7월 15일 MS 본사. 빌 게이츠가 참석한 가운데 22년 동안 MSR을 이끌어온 책임자 릭 래시드 박사의 예상치 못한 이임식 행사를 보게 됐다. 게이츠는 1992년 혁신적 운영체계 SW를 만든 CMU 래시드 교수를 초빙해 MSR를 만들었다. MSR은 이후 세계적인 연구자들이 선호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연구소가 됐다. 그의 퇴임은 대학보다도 더 자유로운 이 연구소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MSR 연구자들이 이제 좋은 시절이 갔다고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2014년 MS는 사티아 나델라를 CEO로 임명하고 클라우드 기업으로의 변신을 가속했다. SW 1위 기업의 고객 기반과 MSR 등에 축적된 에너지를 모아 새로운 카테고리의 SW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으로의 전환이 시작됐다. MS 팀즈가 원격 화상 협업의 토털 솔루션으로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팀즈의 최고 아키텍트를 맡고 있던 친구 요하네스 게르케 박사가 MSR의 시애틀 본사 연구를 이끌게 됐다는 소식이 왔다. 준비된 자만이 패러다임 전환의 영광을 취한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
서울대 전기공학사, 계측제어공학석사, 스탠퍼드대 박사. 2014~19년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초대 원장. 2002년 실리콘밸리에 실험실벤처를 창업했다. 이 회사를 인수한 독일 기업 SAP의 한국연구소를 설립해 SAP HANA가 나오기까지의 연구를 이끌고 전사적 개발을 공동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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