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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옥동석의 이코노믹스

북유럽처럼 강력한 구조조정하면서 복지지출 늘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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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재정역량과 기본소득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문재인 대통령은 ‘전시재정’을 언급하면서 “재정역량을 총동원하자”고 촉구했다. 전시재정은 전쟁의 승리와 함께 전후의 번영까지 대비해야 의미가 있다. 만약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잃어버리면 코로나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재정 당국은 한국전쟁에서도 국방비 이외에는 뼈를 깎는 각오로 재정 긴축을 강행해 흑자재정을 달성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전시재정도 절반이 지출 구조조정 #한국 이미 복지재정 부담 적지않아 #북유럽도 개혁 병행해 복지 뒷받침 #정부지출 조정해야 복지 지속 가능

결국 전시 재정의 절반은 정부지출 구조조정에서 나와야 한다. 더구나 정부지출 구조조정은 그 자체가 경기부양을 위한 수단이 된다. 전통적인 케인스학파는 정부지출의 증감이 총수요에 미치는 직접적 영향만을 고려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는 재정 긴축이 재정 건전성에 대한 기대를 상승시켜 총수요를 증가시킨다는 간접적 효과가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경기 부양적 재정 긴축’이다.

정부지출 구조조정은 능률과 실용적 성과를 구하는 과정이다. 형평성과 공공성은 모호하기에 이념 지향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근대적 정의론의 주창자, 존 롤스(J. Rawls) 역시 정의의 원칙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노력을 통해 이념의 탈을 걷어내라고 주장했다. 복지지출은 기본적 인권과 보편적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비(非)복지 재정지출은 경제성장을 위한 창의와 혁신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 모범은 북유럽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 북유럽 노르딕 국가를 비롯해 서구의 복지 국가들도 초기에는 복지정책의 목표를 완전고용과 소득분배 개선에 두고 경제성장을 위한 구조조정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개인들은 완전고용과 소득재분배를 위한 적대적인 투쟁에 주력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경제위기 속에서 적대적 투쟁이 공동체 전체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복지정책에 대해 보다 세련된 원칙과 개념을 발전시켰다.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상호 신뢰와 합의 속에서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령화 속도 빨라 복지지출 급증

그라픽=최종윤

그라픽=최종윤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은 강력한 복지정책과 강력한 구조조정의 병행이라는 복지국가의 비전을 만들어냈다. 한편으로 복지정책을 추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 지향적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전형으로 알려진 북유럽 노르딕 국가들에서도 복지정책의 목표는 강력한 시장 지향적 구조조정을 수용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천명하고 있다. 어떤 국가가 복지국가의 비전을 얼마나 현실성 있게 추진하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지재정의 규모뿐만 아니라 규제개혁과 정부재정의 구조조정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평가해야 한다. 특히 비복지 재정 분야에서 얼마나 긴축하고 있는가는 곧 복지국가의 실질적 가늠자가 될 수 있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기본소득 논의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이 10.9%에 불과하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 21.8%보다 약 11%포인트 낮지만, 고령화의 정도에 따른 차이일 뿐이다. 더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비복지 재정 비중이 주요 선진국들보다 높다는 점이다. 고령화와 무관한 비복지 재정은 한국이 21.4%로서 OECD 평균치 20.4%보다 1%포인트 높다. 더구나 아일랜드 11.5%, 일본 15.1%, 독일 17.5%, 영국 18.2%, 스위스 18.4%, 호주 19.0%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높다. 이는 한국의 재정지출 구조, 즉 사회 전반에 대한 정부개입 범위와 형태에 상당한 구조조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구나 한국은 OECD 중에서도 일반정부가 아닌 공기업에 의한 정책사업이 과도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절대 가볍지 않다.

한국은 지출 조정 제도적 장치 없어

GDP 대비 일반정부 지출 비중

GDP 대비 일반정부 지출 비중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에서 재정지출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적 틀이 구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재정은 기본적으로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모든 사람이 국가재정에서 더 많이 취하기 위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투쟁을 질서 있게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은 선진국에서 이미 검증된 합리적 재정제도조차 구비하지 못한 채 여전히 후진적인 재정운용에 안주하고 있다.

재정지출의 구조조정은 중앙의 강력한 명령과 통제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은 청와대와 중앙 예산 당국의 강력한 지시에 의해서만 재정지출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져 왔을 뿐이다. 보다 민주적이고 개인의 합리성에 부합하는 자발적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제도적 장치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다. 그 장치는 노무현 정부에서 제시된 4대 재정개혁의 핵심적 내용 중 하나인 총액배분 자율편성이다. 이 개혁이 지지부진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국회 예산제도의 부실에 있다. 민주화 이후 국회의 예산 권한은 지속해서 확대됐지만, 국회의 합리적 예산심사를 유도하는 국회 예산제도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총액배분 국회 예산제도는 행정부의 예산편성 이전에 재정 총량과 주요 분야별 지출 한도를 결정하고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다. 국회의 개별 상임위는 주어진 지출 한도 내에서 예산을 심사하여야 하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재정 총량 규모와 분야별 한도금액을 준수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분야별 한도가 있을 때 특정 사업의 지출증가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업의 지출감소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체의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은 국가재정이 한정된 공유자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지 분야에서는 목표집단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정책수단을 선택해야 하고, 비복지 분야에서는 소득 분배적 요소를 과감하게 들어내야 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재정지출 조정해야 기본소득 도입도 가능

경제정책은 사회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경제성장과 소득분배로 양분한다. 경제성장은 거의 모든 사람이 합의하는 사회적 목표로서 분명하고도 객관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반면 소득분배의 형평성에 대해서는 그 정의조차 사람마다 서로 달라 과학적 접근이 어렵다. 이 때문에 경제학은 경제성장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득분배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책목표를 경제성장과 소득분배로 구분하는 접근은 정책수단의 선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0∼70년대 서구 선진국에서 복지지출이 증가하며 소득분배 기능이 강화되자 경제성장 정책의 필요성이 보완적으로 제기됐다. 재정지출의 구조조정과 각종 규제개혁을 통해 시장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노력이 1980년대부터 적극 추진됐다. 선진국은 복지지출 증가를 용인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정부재정과 산업정책에서 소득 분배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들어내기 시작했다. 소득분배와 경제성장이라는 정책목표는 가급적 분리돼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나의 정책수단에 여러 정책목표가 혼재돼 있다면 최적의 정책조합을 끌어낼 수 없다는 신념이다.

이런 신념은 정부의 개인에 대한 보호가 시장과 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아니라 복지라는 직접적 수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정책 방향을 형성했다. 어떤 나라든지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는 정부가 특정한 산업과 기업을 육성하고 또 특정한 직종과 지역을 보호하는 선별적 정책을 취한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시장기능이 보편적으로 완성되고 수용된다면, 정부는 특정 부문에 대한 선별적 정책이 아니라 개인을 직접적이고도 보편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으로 점차 전환한다. 최근의 기본소득 논의도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복지정책은 개인의 자기 책임성을 강화하고 개방과 경쟁을 통한 구조조정을 적극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종의 보험사업인 것이다. 앞으로 기본소득 논의는 이런 복지체계의 입체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