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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뜨거운 감자’된 기본소득제…"세금 더 낼 각오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본소득제의 취지를 이해한다.”(8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해야.”(4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기본소득제가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여야 모두 기본소득제 방안에 무게를 싣고 공론화를 시작했다.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핵심 의제로 부상할 분위기다.

문제는 현실성이다.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매월 나눠주는 데 필요한 돈을 정부가 무슨 수로 마련할 지다.

더불어민주당 코로나19 국난극복위원회 이낙연 위원장이 3일 오후 청주 SB플라자에서 열린 충청권 간담회에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코로나19 국난극복위원회 이낙연 위원장이 3일 오후 청주 SB플라자에서 열린 충청권 간담회에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기획재정부가 가구당 100만원씩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 예산(14조3000억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올 5월 5184만 명)를 기준으로 기본소득제를 시행하는 데 필요한 재정 규모를 추산했다.

가구당 월 20만~50만원을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연간 34조~86조원이 든다. 가구당이 아닌 1인당으로 지급 기준을 바꾸면 재정 소요는 더 늘어난다. 전 국민에게 월 20만원에서 50만원을 주려면 124조원에서 311조원에 이르는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

만약 전 국민에게 50만원씩 지급하는 기본소득제가 시행된다면 단일 제도로는 유례없는 300조원대 규모의 ‘수퍼 사업’이 탄생하게 된다. 3차 추가경정예산까지 포함한 올해 정부 총지출 예산은 547조1000억원이다. 기본소득제 하나에만 1년 전체 예산의 절반 이상(56.8%)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본소득제 월 지급시 예상 재정 소요. 그래픽=신재민 기자

기본소득제 월 지급시 예상 재정 소요. 그래픽=신재민 기자

정치권에서 기본소득 지급 대상과 주기를 놓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지만 어떤 제도든 수조, 수백조원의 예산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은 같다. 긴급재난지원금처럼 예산 지출액을 추가(추경 편성)하고 빚을 낸다(적자 국채 발행)고 해서 메워질 액수가 아니다. 1회성으로 끝날 정책도 아니다. 한번 시작하면 매월, 매년 지급해야 한다.

결국 정부 수입(세금)을 늘리고 기초연금, 아동수당 같은 기존 복지 지출을 대대적으로 구조조정하는 방법밖에 없다.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에 증세론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세금을 낼 사람은 줄고, 나랏돈 지원을 받을 사람은 늘어나는 상황에서 증세 논의 없는 기본소득제는 자칫 정부 재정으로 막을 수 없는 ‘폭탄 돌리기’가 될 수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증세 없는 기본소득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처음으로 시도된 긴급재난지원금 이후 기본소득의 정치적 가치가 높아졌지만,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 논의 등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본소득제 연 지급시 예상 재정 소요. 그래픽=신재민 기자

기본소득제 연 지급시 예상 재정 소요. 그래픽=신재민 기자

이미 나라 재정은 바닥을 보인 상태다. 3차 추경을 짤 때도 마른 수건 짜기 식으로 지출 예산을 줄였지만 결국 부족해 23조8000억원의 적자 국채를 발행해 충당했다. 올해는 세금 수입마저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가 최근 국회에 제출한 3차 추경에도 세수 감소분과 세제 감면을 보전하기 위한 세입경정 11조4000억원이 포함돼 있다. 올해는 부진한 경기에 코로나19 위기가 겹쳐 법인세가 덜 걷히고, 소비ㆍ수입이 줄어 부가가치세ㆍ관세도 줄어들 전망이라서다. '리쇼어링'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법인세율을 높여서 해결하는 방안은 효과와 현실성에서 모두 설득력이 낮다.

전 국민 모두의 기본 소득을 보장하려면, 모두가 세금을 더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른바 '보편 증세'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한국의 근로소득 면세자는 38.9%(2018년분 소득 기준)에 이른다. 유리 지갑이라는 근로자조차 10명 중 4명이 세금(근로소득세)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있는 셈이다. 미국(30.7%), 일본(15.5%)보다 한참 높다.

기본소득을 타깃으로 한 증세도 쉽지 않다. 조준모 교수는 “기본소득만을 위해 증세를 하면 국민이 기본소득을 받는 효용보다 높은 세금을 내는 고통이 커지면서 저항에 봉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기초연금ㆍ아동수당 같은 기존 현금성 지원 사업을 기본소득제 아래로 합치는 복지제도의 대대적 개편이 앞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까지 한국 복지제도의 근간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특정 계층에 대한 선별 복지였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 주장에 따라 아동수당, 기초연금 등이 도입됐지만 전 국민 기본소득과는 거리가 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기본소득 논의가 진행된다면 결국 복지 지원 대상은 이들을 포함한 전 국민으로 확대되는 셈”이라며 “기본소득을 줄지 말지에 대한 거친 논의보다는 기본소득을 위해 어떤 복지 제도를 유지하고 정비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조현숙ㆍ임성빈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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