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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기업 저승사자, 미국의 반부패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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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호 21면

미국 함정

미국 함정

미국 함정
프레데릭 피에루치,
마티유 아롱 지음
정혜연 옮김
올림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은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행위를 처벌하는 ‘도덕적인’ 법이다. 제정 계기부터 극적이다. 미 군수업체 록히드는 1970년대 전투기·수송기·여객기 등의 해외 판매를 위해 서독·이탈리아·네덜란드·사우디아라비아·일본 등에 뇌물을 주다 발각됐다.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1893~93, 72~74년 총리 재임) 총리는 퇴임 뒤 록히드 스캔들로 투옥됐으며 여생을 재판으로 보냈다.

‘도덕주의 외교’를 들고나왔던 지미 카터(96·76~81년 재임) 미 대통령은 이를 놓치지 않고 77년 해외부패방지법을 제정했다. 뇌물 없이 공정거래가 이뤄지는 세계를 만들려 했지만 이는 이상이었을 뿐이다. 현실에서 이 법은 미국 국익을 위해 주요 기술을 보유한 해외 기업을 전략적으로 압박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국가전략사업인 고속철과 원전·발전설비를 취급하는 프랑스 중공업 업체 알스톰의 자회사 최고경영자(CEO)였던 지은이 프레데릭 피에루치는 경험담을 바탕으로 이런 불합리를 증언하고 고발한다.

해외부패방지법은 미국에 상장하거나, 주요 사업장이 있거나, 미국 법에 따라 세운 기업이 대상이다. 하지만 피에루치는 거래에 달러를 사용하고 미국에 서버가 있는 e메일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2013년 뉴욕의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됐다. 미 법무부는 그를 압박해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알스톰으로부터 7억7200만 달러의 벌금을 받아냈다. 알스톰은 결국 최대 경쟁사였던 미국 GE에 에너지 부분을 매각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 벨포르의 알스톰 건물. 미국 법을 어겼다고 막대한 벌금을 물었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벨포르의 알스톰 건물. 미국 법을 어겼다고 막대한 벌금을 물었다. [AFP=연합뉴스]

지은이는 원래 미국 기업의 해외 부당거래를 막으려고 만든 이 법이 실제로는 주로 외국 기업에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수출산업인 에너지·군수·제약 부문의 해외진출이 이 법 때문에 막히자 미국 당국은 2008년 법을 개정해 역외관할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집행을 맡은 미 법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는 전 세계를 상대로 날이 선 검을 휘두르며 징벌금을 물려왔다. 2008년 독일 중공업 업체 지멘스가 아르헨티나·이라크에 뇌물을 준 사실을 발견하고 벌금·이익환수금을 합쳐 8억 달러를 받아냈다. 독일 도이치텔레콤, 영국 롤스로이스, 프랑스 토탈 등 유럽 기업이 미국에 낸 벌금 총액이 60억 달러를 넘는다. 미국 기업의 징벌금은 전체의 15%도 안 된다.

지은이는 이를 바탕으로 해외부패방지법이 경쟁력 있는 전략산업과 기업을 가진 모든 외국을 목표로 삼는다고 강조한다. 겉으로는 경제윤리와 부패방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세계 경제를 장악하는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문제는 미국이 이 법을 전 세계에 적용하고 있지만 미국 밖의 국가와 기업이 이에 대응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프랑스가 최근 관련 법령을 만들었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입법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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