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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영환의 지방시대

평생 현역 마을, 한국형 CCRC 설계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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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개관 12년 서천군 복지마을의 반향

충남 서천군의 서천어메니티복지마을 전경. 주거·요양·여가 시설이 갖춰진 이곳은 복지 요람이자 한국형 은퇴자주거복합단지의 초기 모델이다. [사진 서천군청]

충남 서천군의 서천어메니티복지마을 전경. 주거·요양·여가 시설이 갖춰진 이곳은 복지 요람이자 한국형 은퇴자주거복합단지의 초기 모델이다. [사진 서천군청]

천혜의 입지였다. 해송자연휴양림 희리산(329m) 자락에 바다까지 약 4㎞. 여기에 400여m 떨어진 서해안고속도로. 지난 22일 오전 11시 충남의 남단 서천군의 서천어메니티복지마을은 아늑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진입로를 따라가자 전체 면적 12만여㎡에 들어선 요양·여가·주거시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시설 아래쪽 파크골프장에는 고령자들이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더 안쪽으론 호수(장항제)가 눈에 들어왔다. 천주교 대전교구가 위탁 운영 중인 마을은 개관 12년째로 초집적(超集積) 복지 요람이다.

주거·돌봄·여가시설 한데 어우러진 #서천군 복지요람은 CCRC 초기 모델 #건강할 때 입주해 일하며 노후 맞는 #다세대 통합형 단지가 지방도 살려

출발은 2005년 서천군이 보건복지부의 농어촌복합노인복지단지 시범지역으로 선정되면서다. 당시 강원도 영월군, 전북 진안군, 전남 담양군도 뽑혔지만 복합 복지타운은 서천군이 유일하다. 350억원을 들여 노인 복지관·요양병원·요양시설, 장애인 종합복지관·보호작업장, 고령자용 국민임대아파트(보금자리 주택)를 갖췄다. 파크골프장 외 한방 찜질방, 야외 공연장도 자랑거리다. 거주민 이정구(79)씨는 “20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청주에서 혼자 살다가 테니스 동호회 친구 소개로 4년 전 건강을 고려해 입소했다”며 “주변 자연환경이 좋은 데다 복지관이 바로 옆이라 동아리(실버합창단)와 다른 여가 활동도 할 수 있어 너무 좋고 편하다”고 말했다.

아파트는 33㎡형 96세대, 51㎡형 11세대로 전국의 65세 이상이 자격 요건이다. 입주민 평균 나이는 80대 초반이고 독거 세대가 약 70%다. 건물은 무장애(barrier-free) 공간으로 지어졌다. 복지관과 장애인 종합복지관·보호작업장은 서천군민을 위한 시설이고, 요양병원(정원 197명)과 요양시설(정원 99명)은 거주지 제한이 없다. 평소 복지관은 하루 300~350명, 장애인복지관은 150~200명이 이용한다. 복지관 프로그램은 합창단에서 태권도, 요리 교실까지 다채롭다. 탁구, 당구, 배드민턴도 가능하고 다문화 홀에선 문화 행사도 연다.

주민들이 태권도 교실에 참가하고 있다. [사진 서천복지마을]

주민들이 태권도 교실에 참가하고 있다. [사진 서천복지마을]

전체 종사자는 약 250명이다. 마을은 고령화 시대의 복지와 일자리가 공생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서천군 인구는 5만2374명으로 65세 이상이 세 명 중 한 명(35.7%)이다. 이명근 복지마을 기조실장은 “앞으로 요양병원은 치매 전문화 병원으로 특화할 방침”이라며 “복지마을은 시설 규모가 크고 기초단체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광역단체의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서천군의 재정자립도는 13.9%지만, 노인복지관과 요양병원의 올해 지원 예산(23억여원)의 56%가 군비다. 나머지는 국비와 도비다.

서천복지마을은 민간 공급의 실버(시니어)타운이나 공공 노인주거복지시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대단지에 주거·의료·돌봄·여가 시설을 한데 모은 해외 은퇴자주거복합단지(CCRC·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를 국내에 적용한 초기 모델이다. CCRC는 은퇴자나 고령자들이 건강한 시기에 들어가 지속적인 돌봄 서비스를 받고 여가를 즐기면서 노후를 맞는 마을이다.

주민들이 종이접기 강사 양성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사진 서천복지마을]

주민들이 종이접기 강사 양성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사진 서천복지마을]

서천복지마을을 견학하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것은 한국형 CCRC 실험 때문이다. 지자체·연구기관·사회복지시설 관계자와 학생 등 연간 1000명 정도가 찾아간다. 정소이 토지주택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초고령사회가 도래하지만, 고비용의 민간 실버타운은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고 고령자용 공공임대주택은 저소득층에 한정돼 있다”며 “중간 소득계층 은퇴자나 고령자를 위한 주거+의료+돌봄 모델을 개발하되, 여러 세대가 어울려 사는 세대 통합형 단지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미국 CCRC 1955곳, 선시티는 주민이 4만명

CCRC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 투자은행 지글러(Ziegler)에 따르면 2017년 기준 CCRC는 모두 1955곳이다. 이 중 78%를 비영리법인(NPO)이, 22%를 민간회사가 운영한다. CCRC 규모는 천차만별로, 중위 주택 수는 120호다. 입주 계약 형태는 거의 ABC 세 가지로, 무제한의 헬스케어 서비스를 받는 A 타입이 가장 비싸다. 미 정부회계감사원(GAO) 조사 결과, A 타입 입주비는 16만~60만 달러(약 2억~8억5000만원), 월세는 2500~5400달러다. 서비스를 받을 때만 비용을 내는 C타입은 입주비가 10만~50만 달러, 월세가 1300~4300달러다. 미국의 취약한 공적 의료시스템이 CCRC를 거대 시장으로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입주자도 중상위 계층이 많다.

CCRC의 대명사는 남서부 애리조나주 선시티(Sun City)다. 부동산개발업자 델버트 웹이 1960년부터 55세 이상의 현역 마을(55+active adult community) 내걸고 사막 한가운데 조성한 CCRC다. 55+를 내건 것은 미국에서 처음이기도 하다. 분당신도시의 약 2배 면적(38㎢)에 주택이 2만6000호로 약 4만명이 생활하고 있다. 중위 월세는 1067달러, 거주자 중위 연령은 73.2세다. 시설은 다채롭다. 11개의 골프장과 레스토랑, 수영장, 공방 등을 갖춘 7개의 레크리에이션 센터, 19개의 쇼핑센터, 525개 병상의 종합병원도 갖췄다. 입지도 편리하다. 주도(州都) 피닉스시와는 약 25㎞ 떨어져 있고, 애리조나주립대가 반경 10㎞ 내다. 미국에는 대학이 운영하는 대학연계은퇴자단지(UBRC)도 100곳을 넘는다. 대학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젊은 세대와 교류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일본은 2014년부터 일본판 CCRC(생애활약마을)를 본격화했다. 은퇴자나 고령자가 건강한 상태에서 입주해 건강 장수를 꾀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CCRC와 한 맥락이다. 하지만 민간 주체의 미국 CCRC와 달리 일본은 중앙 정부·지자체의 관 주도다. 대도시권의 고령화에 따른 요양 대책, 지방 창생(創生)과도 맞물려 있다. 큰 그림은 중앙 정부가, 기본계획은 지자체가 만들어 운영 주체에 예산 지원을 한다. 현재 기본계획을 책정한 지자체는 89곳으로 연말까지 100곳이 목표다. 입주자 기본 모델은 일반적인 퇴직자로, 국민연금 제도의 표준적 월 연금액인 21만8000엔(약 250만원)을 받는 고령자 부부다. 의료·요양 서비스는 CCRC가 제공하는 미국과 달리 기존의 공적 제도가 뒷받침한다.

일본, 관 주도로 지방 창생에 주안점

일본판 CCRC가 지역사회 밀착형으로 다세대 교류를 중시하는 점은 우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해와 면한 이시카와(石川) 현 가나자와(金澤)시의 ‘셰어(Share) 가나자와’는 대표적 다세대 교류형 CCRC다. 병원 부지(약 3만6000㎡)에 2014년 개소한 곳으로 고령자, 대학생, 장애아동이 함께 생활한다. 고령자 주택은 32호로, 월 비용은 1인 12만엔, 부부 14만엔이다. 운영단체(붓시엔) 관계자는 통화에서 “학생 주택은 5개동으로 입주비(월 4만엔)가 싸지만 매달 30시간의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며 “가나자와 시내와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내가 만드는 마을’이라는 슬로건답게 고령 입주자가 장애 아동을 돌보고, 공동매점 판매 봉사를 한다. 천연온천장 이용은 무료이고, 고령자 주간보호시설, 레스토랑, 갤러리도 갖췄다.

한국의 향후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베이비부머 1685만명이 65세 이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2045년엔 고령화율이 37%로 일본(36.8%)을 앞지른다. 인구의 절반이 몰린 수도권에 의료·요양 대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방은 사람이 빠져나가 소멸 경보등이 켜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월 한국형 CCRC 모델을 모색하는 세미나가 열린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행사를 주관한 서형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정부가 고령자 복지주택 공급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공급량은 미미하고, 급증하는 고령 인구에 대응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며 “이 문제의 대안이 한국형 CCRC에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평생 현역 마을의 설계를 본격화할 때가 됐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