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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있고 세련된 공간에 꼭 있다는, 이 사람의 리빙 소품

중앙일보

입력

달 항아리, 십장생 등 전통 문양을 연구하는 장응복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13일 경기도 파주의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우상조 기자

달 항아리, 십장생 등 전통 문양을 연구하는 장응복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13일 경기도 파주의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우상조 기자

요즘같이 햇빛이 실내 깊숙이 들어올 때면 장응복 패턴 디자이너의 ‘볕 가리개’가 생각난다. 여름날 창문이나 대청에 걸어놓고 햇볕을 가렸던 대나무 발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패브릭 커튼. 백자 항아리 등 전통문화 고유의 아름다움이 녹아있는 장 디자이너의 볕 가리개는 단순하면서도 공간을 우아하고 기품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를 ‘동시대 감각의 한국적 디자인을 풀어나가는 디자이너’로 부르는 이유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전통 대나무 발과 서양의 커튼을 재해석한 ‘볕 가리개’는 공간을 운치 있게 만들어준다. 모두 다른 문양과 색깔을 갖고 있지만 여러 장이 겹쳐도 묘하게 한 데 어울린다. 우상조 기자

전통 대나무 발과 서양의 커튼을 재해석한 ‘볕 가리개’는 공간을 운치 있게 만들어준다. 모두 다른 문양과 색깔을 갖고 있지만 여러 장이 겹쳐도 묘하게 한 데 어울린다. 우상조 기자

지난 13일 파주에 있는 장응복 디자이너의 공방이자 브랜드인 ‘모노콜렉션’으로 찾아갔을 때, 실내에는 여러 장의 볕 가리개가 겹겹이 걸려 있었다. 모두 다른 문양과 색깔을 갖고 있었지만 묘하게 한 데 어울렸다.
“심플한데 촌스럽지 않죠.(웃음) 그림 작품 한 점을 걸었을 때처럼 기분도 좋아지고.”
요즘 감각 있게 집을 잘 꾸몄다고 하는 사람들의 집에 가면 장 디자이너의 패브릭 제품 하나쯤은 볼 수 있다. 부분적으로라도 한국적인 정서를 공간에 담으려는 사람들의 집이다.

지난해 하지훈 가구 디자이너와 함께 '운경고택'을 배경으로 다양한 작품을 전시했던 공간. 안채 건넌방에 전시된 장응복 디자이너의 ‘백자호 지장’‘소반다리 화문석’ ‘보료와 잇기이불’, 하지훈 디자이너의 ‘호족평상’‘원형반’ ‘달조명’, 두 작가가 협업한 ‘삼각침’. [사진 운경재단]

지난해 하지훈 가구 디자이너와 함께 '운경고택'을 배경으로 다양한 작품을 전시했던 공간. 안채 건넌방에 전시된 장응복 디자이너의 ‘백자호 지장’‘소반다리 화문석’ ‘보료와 잇기이불’, 하지훈 디자이너의 ‘호족평상’‘원형반’ ‘달조명’, 두 작가가 협업한 ‘삼각침’. [사진 운경재단]

장 디자이너는 ‘검박하지만 풍요로움을 담고 있는 아름다움’을 한국적인 정서라고 정의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 떠오른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섬유예술을 전공한 장응복 디자이너는 학교 졸업 후, 텍스타일 디자인 회사를 다녔다. 1986년에는 아예 패브릭 관련 회사를 차렸다. 목표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규모의 텍스타일 박람회 ‘헤임텍스타일’에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가겠다는 것. 2000년에 비로소 그 꿈이 이루어졌지만 그는 동시에 길을 잃었다고 했다.
“나만의 아이덴티티, 내 브랜딩이 없었던 거죠. 그때부터 ‘한국적인 정서와 전통 문양’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장응복 패턴 디자이너가 만든 리빙 소품들 #백자 항아리, 십장생 등 전통 문양이 바탕 #"전통 문양에선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죠"

그에게 한국적인 정서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간송 집안과 6촌인 어머니는 솜씨가 좋아서 한복에 조바위(머리 장식)까지 만들었다. 서울 성북동과 정릉에서 자라며 ㄷ자 형태의 한옥 살림에 익숙했던 경험도 무관하지 않다.

달 항아리, 십장생 등 전통 문양을 연구하는 장응복 패턴 디자이너가 13일 경기도 파주의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우상조 기자

달 항아리, 십장생 등 전통 문양을 연구하는 장응복 패턴 디자이너가 13일 경기도 파주의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우상조 기자

장응복 디자이너의 작업은 ‘산-수’ ‘도원몽’ ‘담’ 세 가지 주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산-수’는 도(道)와 음양사상, 그리고 동양화의 산수풍경을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도원몽’은 우리의 민예(民藝·민중의 생활 속에 전해진 공예 또는 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대담한 색상과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물성을 담고 있다. ‘담’은 한국의 단색화에서 시작됐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천을 적시며 겹겹이 물들어가는 느낌이 깊고 담담하다.

장 디자이너가 제작한 작품들. 사진 속 물고기 인형은 버려지는 자투리 천으로 ‘조각잇기’를 한 것이다. 우상조 기자

장 디자이너가 제작한 작품들. 사진 속 물고기 인형은 버려지는 자투리 천으로 ‘조각잇기’를 한 것이다. 우상조 기자

이 외에도 장 디자이너가 자연과 일상, 전통 미술에서 미학적 영감을 얻어 창안한 자기만의 무늬는 셀 수 없이 많다.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김홍희씨의 표현을 빌리면, 겸재의 ‘금강전도’를 비롯해 자연을 재현한 산수화에서 한국 산천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화조도·십장생도·어해도·문자도·길상문에서 색채와 구성의 상징성을 학습하는 한편, 청자·백자·분청과 같은 도예품, 부채·골무·꽃신·자개 패·왕골 같은 민예품에서 선조들의 생활 풍습을 상상하며 자신 특유의 무늬 미학을 구축하고 무늬 디자인을 구현해왔다. 2017년 펴낸 책 『무늬』에는 그 중 40여 개의 문양이 담겨 있다.

장 디자이너가 제작한 제품들. '산-수' '도원몽' '담' 등을 주제로 장 디자이너는 한국의 자연과 일상, 전통 미술에서 미학적 영감을 얻어 다양한 자기만의 무늬를 만들어낸다. 우상조 기자

장 디자이너가 제작한 제품들. '산-수' '도원몽' '담' 등을 주제로 장 디자이너는 한국의 자연과 일상, 전통 미술에서 미학적 영감을 얻어 다양한 자기만의 무늬를 만들어낸다. 우상조 기자

요즘 그가 새로 몰두하고 있는 주제는 ‘정령(the Guardian)’이다. 2017년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방한하기 전 청와대 상춘재를 꾸미면서 발견한 느티나무 마룻바닥이 출발점이다. 바닥의 오래된 니스 칠을 깨끗이 벗겨내고 그 위에 옻칠을 새로 하면서 발견한 느티나무 무늬가 너무 아름다웠다고 한다.
“어느 동네마다 마을 어귀에 한 그루쯤 서 있는 느티나무는 동네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많은 염원을 담고 있죠.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고, 그 산마다 우리를 지켜주는 신이 있다고 믿잖아요. ‘정령’이라는 주제는 우리 산천의 나무와 풀, 자연에 담긴 자연 현상을 문양으로 옮기는 작업이에요.”
자연의 표면에 드러난 불분명한 패턴을 다루는 게 정령의 특징이다. 과거에는 부채·꽃신·백자호처럼 확실한 형체를 그렸다면, 이젠 색과 선으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유분방함을 표현하고 있다.

장응복 디자이너의 브랜드 숍이자 공방인 '모노콜렉션'에는 볕 가리개, 조명, 소파, 화문석, 쿠션 등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 제품들이 전시돼 있다. 모두 장 디자이너가 고안한 전통 문양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우상조 기자

장응복 디자이너의 브랜드 숍이자 공방인 '모노콜렉션'에는 볕 가리개, 조명, 소파, 화문석, 쿠션 등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 제품들이 전시돼 있다. 모두 장 디자이너가 고안한 전통 문양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우상조 기자

장응복 디자이너의 작업은 라이프 스타일 전반을 아우른다. 볕 가리개, 이불, 소파, 램프, 벽지, 쿠션, 보자기 등등.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물고기와 거북이 인형은 버려지는 자투리 천을 모아 ‘조각 잇기’를 했기 때문에 세상에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다.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포장을 줄이고 재활용 재로를 사용해 쓰레기를 줄이려는 캠페인)’ 아이템이자 세상에 유일한 디자인인 걸 알면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장 디자이너의 작품 중 남녀노소는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거북이 인형. 버려지는 자투리 천으로 ‘조각잇기’를 했기 때문에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다. 우상조 기자

장 디자이너의 작품 중 남녀노소는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거북이 인형. 버려지는 자투리 천으로 ‘조각잇기’를 했기 때문에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다. 우상조 기자

하지훈 가구 디자이너가 만든 삼각침에 장 디자이너가 만든 백자 항아리 문양의 패브릭을 씌웠다. 삼각침은 좌식 생활에서도 불편하지 않도록 아이디어를 낸 등받침이다. 우상조 기자

하지훈 가구 디자이너가 만든 삼각침에 장 디자이너가 만든 백자 항아리 문양의 패브릭을 씌웠다. 삼각침은 좌식 생활에서도 불편하지 않도록 아이디어를 낸 등받침이다. 우상조 기자

전통 미학의 생활 속 활용. 장응복 디자이너가 전통 문양을 비롯한 공예와 비지니스의 가교 역할을 하며 이루고 싶은 목표다. 한국적인 정서와 감성을 살린 텍스타일 디자인을 통해 다양한 목적과 스케일에 따라 쓰임을 달리할 수 있도록 라이프 스타일 제품들을 모듈화하고, 좋은 물건을 오래 쓸 수 있도록 합리적인 가격으로 생산하는 일이다. ‘모노콜렉션’의 제품들이 맞춤 컬렉션만 있는 게 아닌 이유다. 예를 들어 볕 가리개도 가로·세로 1mX1m80cm 기준으로 모듈화했다. 가격은 30만~60만원.

“무늬는 상징적인 이미지의 언어죠. 저는 ‘뜻 그림’이라고도 표현하는데 하나의 부적처럼 어떤 공간에서 기운을 바꾸고 좋은 에너지를 방출하죠. 한국의 전통 문양을 잘 표현하기보다 한국적인 정서를 잘 표현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이유죠. 시간이 응축된 좋은 기운을 현대인의 일상이 좀 더 풍요로울 수 있도록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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