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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적은 내 친구" ... 전투기 동원해 이란 유조선 엄호한 베네수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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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앞바다엔 이란의 유조선이 군함과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항구에 도착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25일(현지시간) 이란에서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이 베네수엘라로 들어오고 있다. [AP=연합뉴스]

25일(현지시간) 이란에서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이 베네수엘라로 들어오고 있다. [AP=연합뉴스]

타렉 엘아이사미 베네수엘라 석유장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유조선을 맞은 것은 물론,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직접 뜨거운 환영 인사를 내놨다.

총 153만 배럴의 휘발유를 실은 다섯 척의 유조선이 도착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정부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배들의 입항이 통상적인 무역이 아닌, '미국의 적'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합심해 만든 정치성 짙은 거래였기 때문이다.

마두로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란, 고마워"라고 남기고 "우리의 우정만이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TV 연설에서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 앞에 절대 무릎 꿇지 않을 혁명 국가들"이라며 두 나라의 연대를 강조했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인 베네수엘라가 이란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최악의 경제난에 미국의 제재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재임 기간(1999년~2013년)만 해도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중남미 좌파진영을 이끌었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투자 부족 등 여러 문제가 누적되며 현재는 자국에서 쓸 연료용 기름조차 대지 못하는 처지다.

정유 시설은 낡을 대로 낡았는데 미국의 제재로 손도 쓸 수 없고, 설상가상으로 정유 기술자들은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갔다. 역시 경제난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 나라 석유생산량은 10여년 전 하루 300만 배럴에서 현재 하루 약 60만 배럴로 뚝 떨어졌다.

이란 유조선이 도착하자 직접 항구로 나간 타렉 엘아이사미 베네수엘라 석유장관. [로이터=연합뉴스]

이란 유조선이 도착하자 직접 항구로 나간 타렉 엘아이사미 베네수엘라 석유장관. [로이터=연합뉴스]

WSJ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공포 속에서도 시민들은 휘발유를 사기 위해 기나긴 줄을 서야 한다"며 "코로나19와 싸워야 할 의사들조차 연료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이 손을 내밀었다. 이란은 기름은 넘쳐나지만 미국의 경제 제재로 달러를 구하기 어려운 상태다. 베네수엘라에 기름을 대는 대신 국제교역에서 환금성이 좋은 금을 받기로 한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베네수엘라 측은 불법적으로 축적해둔 금을 테헤란에 제공하는 대신 석유를 받았다"며 이들의 거래를 맹비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베네수엘라는 석유가 필요한 반면 금이 있고, 이란에는 석유가 넘쳐나지만, 저유가에 돈이 없는 상황"이라며 "두 나라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들을 재제할 옵션이 더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란 확신 아래 이렇게 상부상조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군사 옵션을 제외한 대부분 제재가 이미 실행되고 있어서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기름이 떨어진 차가 멈춰서자 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베네수엘라는 최근 심각한 연료난을 겪고 있다. [AP=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기름이 떨어진 차가 멈춰서자 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베네수엘라는 최근 심각한 연료난을 겪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에 '악의 축'으로 불리는 이란이 굳이 베네수엘라와 손잡은 데는 다른 뜻도 있다. WSJ는 "이란은, 미국이 '뒤뜰'로 여기는 중남미에도 자신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과시하고 싶어한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베네수엘라는 이란의 긴급 수혈로 최대 한 달가량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물물거래'가 결코 장기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을 거란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두 나라는 차베스 전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란에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이 집권할 때였다. 당시 차베스는 이란의 핵 개발을 도울 의향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혀 미국을 자극하기도 했다.

WSJ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이란과 베네수엘라의 가장 큰 공통점은 '미국의 적'이란 점"이라며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몇 년간 베네수엘라가 최악의 경제난을 맞으며 양국 간 유대 관계는 더욱 정치적이고 상징적으로 변모했다"(NYT)는 설명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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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와 이란의 거래에서 쿠바가 덩달아 혜택을 보고 있다는 보도들도 나온다. 이 나라 역시 '미국의 오랜 적'으로 베네수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다. WSJ는 "또 다른 승자는 쿠바"라며 "쿠바 역시 이란에서 연료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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