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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항구의 미래를 묻다

자동차는 알고 있다, 당신의 혈압· 포도당 수치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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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모빌리티(이동수단)의 변신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일이 영 안 풀린다. 저녁 8시. 온종일 회사에서 낑낑대고 있다. 새 기획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골치가 지끈거린다. 일단 정리하자. 경험상 이 상태에서 더 붙잡고 있어 봤자다. 푹 쉬고 새 정신에 시작하는 게 효율 만점이다.

미래형 차는 ‘바퀴 위의 컴퓨터’ #좌석 등받이에 각종 센서 내장 #운전석은 건강 검진센터 기능 #퀄컴도 자동차 의료 분야 진출

사무실에서 나가 차에 올랐다. 아직은 완전한 자율주행이 이뤄지지 않아 내가 운전대를 잡는다. 5분쯤 지나 차량 인공지능(AI)이 말을 건다.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네요.” 그렇다. 인공지능 이 녀석, 운전석에 앉아 있기만 하면 혈압·맥박·호흡 등을 측정해 내 몸 상태를 파악한다. 오늘은 알아서 잔잔한 클래식을 틀어준다. 스트레스 해소 효과가 있다는 음악이다.

갑자기 하드 록이 나온다. 조용한 음악에 졸음이 쏟아지려던 참이다. 눈꺼풀이 두어 번 살짝 내려앉는 걸 인공지능이 감지했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 건다. “10분 거리에 ‘스트레스 쫘~악 풀리는 맛’이라고 하셨던 음식점이 있어요.” 그렇지. 확실히 이 녀석, 기억력 좋고 센스도 있다. “30분 안에 올 수 있는 친구 불러 줘.” 두 명이 오겠단다. 식당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리며 인공지능에게 말했다.

“나오기 10분쯤 전에 내 카드로 계산할 테니, 계산 신호 잡히면 대리운전 콜 부탁해.”

예전이라면 똑똑한 차량 ‘키트’가 나오는 미국 TV 시리즈 ‘전격 Z작전(knight rider)’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이런 차량이 이젠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19가 자동차 산업 변화 가속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자동차 산업은 그간 제조업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이젠 ‘서비스 산업’으로 진화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차량·승차 공유가 그 대표적인 흐름이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가 가세했다. 코로나19는 한쪽에서 흐름을 가속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흐름의 방향을 바꿔 놓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기존 자동차 제조·판매는 2023년까지 저성장 하리라 예견됐다. 코로나19는 그런 자동차 산업을 한층 깊은 저성장·저수익 국면에 빠뜨릴 것이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소비자들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위생적이고 깨끗한 이동 수단을 원하게 됐다. 이로 인해 대중교통 이용과 차량 공유가 제약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대두하고 있다.

제조·판매도 원활하지 않고, 차량 공유 같은 서비스도 막막하다. 자동차 업체로서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안전하고 편리하며 위생적이고, 환경적으로도 깨끗한 이동 수단’이다. 더 정확히 말해 자동차를 그런 이동 수단으로 만들어주는 부품·시스템·솔루션·콘텐츠 사업이다.

사례는 넘친다. 이미 자동차는 ‘바퀴 위의 컴퓨터·스마트폰’이라 불릴 정도로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운전자가 휴대전화를 만지거나 주의가 산만해질 때 경고음을 울리고, 급박한 경우엔 자동차가 스스로 멈추기까지 하는 시스템은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입 모양과 음성 인식, 음주운전 방지를 위한 피부색 변화나 호흡 패턴 인지, 차량 내부 이산화탄소 농도 등을 감지하는 시스템의 수요 역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다른 유력 분야는 운전석에 앉아 있기만 해도 각종 건강 관련 수치를 체크해 주는 ‘헬스 모니터링 시스템’이다. 바이오 센서로 운전자의 체온·맥박·호흡·혈압과 포도당 수치 등을 측정하고, 데이터는 클라우드에 저장하며, 필요하면 의료기관과 연결하는 시스템이다. 운전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발작 등 신체적·정신적으로 긴급 상황을 예방하는 기술도 주목받고 있다. 차량 내부의 다양한 바이오 센서가 신체·정신적 상태를 파악해 긴급 상황이 곧 벌어질 것 같다고 판단하면 의료·응급구조 기관과 연결해 사고를 막아주는 것이다. 이미 볼보·포드·GM·도요타·아우디 같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관련 시스템·솔루션 개발에 뛰어들었다.

미래 자동차의 좌석 ‘액티브 웰니스 2.0’의 기능을 표시한 화면. 좌석이 맥박·혈압·호흡을 체크해 건강 진단까지 한다. [유튜브 캡처]

미래 자동차의 좌석 ‘액티브 웰니스 2.0’의 기능을 표시한 화면. 좌석이 맥박·혈압·호흡을 체크해 건강 진단까지 한다. [유튜브 캡처]

완성차 업체만이 아니다. 영국의 플레세이 반도체와 프랑스 자동차 부품사 포레시아는 운전석 등받이에 반도체를 내장해 운전자의 심장 박동 등을 측정하고 휴대전화로 모니터링 하는 ‘액티브 웰니스(Active Wellness) 2.0 시트’를 개발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미국 반도체 업체 퀄컴 역시 차량용 의료 인터넷 관련 반도체·소프트웨어 분야 진출을 선언했다.

원격진료 없이는 미래차 경쟁력도 없다

새로운 기술·서비스를 접목하면서 2018년 4조5000억 달러(5550조원)였던 자동차산업 총매출액은 2030년 7조7000억 달러(9500조원)로 늘어날 전망이다. 앞으로 10년 사이에 한국 경제 규모의 두 배에 이르는 새 시장이 창출되는 것이다. 그 중 상당한 부분이 헬스케어·빅데이터·보안·사물인터넷·클라우드·인공지능·정밀지도·스마트키 같은 각종 시스템과 솔루션에서 나온다. 완성차 업체와 대형 부품업체들이 이젠 차량·부품에 온갖 기능의 반도체·소프트웨어와 콘텐츠를 얹은 ‘모빌리티 시스템(건강 진단 기능을 갖춘 좌석 등 하드웨어)’이나 ‘솔루션 서비스(소프트웨어)’ 업체로 사업을 전환하는 이유다.

코로나19로 흔들리는 차량 공유와 라이드 헤일링(ride hailing, 전화나 스마트폰 앱으로 차량을 불러 이용하는 서비스) 사업도 되살아날 것이다. 완성차 업체들이 이런 사업을 포기하기보다는 항균기술 개발 등을 통해 수익모델을 개선할 가능성이 높다. 성장성·수익성이 이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완성차 업체가 제일 꼭대기에 있던 자동차산업 구조 자체가 바뀔 전망이다. 차량 공유 같은 모빌리티 서비스가 최상위를 차지하고, 소프트웨어 솔루션 공급 업체 등이 그다음에 놓이는 식으로다. 여기에 퀄컴 등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까지 진입해 경쟁구도를 바꾸게 될 것이다.

이런 시장에서 승자를 배출하려면, 기술개발은 물론이고 규제 완화가 중요하다. 원격진료나 승차·차량 공유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규제 환경에서는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아울러 정부·근로자·제조업체·시민단체 등 이해 관계자 간의 협력이 필수다. 자동차산업의 구조 변화에는 일자리와 근로자 개인 기량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이는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구조만 지키려 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일자리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폐쇄적인 한국 자동차산업,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국내 대기업들도 미래차 산업에 경쟁적으로 진입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말 “2025년까지 61조원을 투자해 ‘스마트 모빌리티’ 회사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완성차 제조는 물론, 각종 이동수단(모빌리티) 서비스 또한 미래 사업의 한 축으로 제시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하만을 인수해 미래차 소프트파워를 강화했다. 하만은 이미 스피커 업체가 아니라 자동차 소프트웨어 업체로 탈바꿈했다. SK는 통신 기반 자율주행차 산업에 진입했으며, LG전자는 독일 차량 조명 업체인 ZKW를 인수해 전장부품 사업을 강화했다.

이처럼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 기업을 인수하거나 해외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미래차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내 공급업체와의 협력이나 인수는 부진한 실정이다. 국내 부품업체가 외국 기업과 협력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얼마 전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외국 완성차 업체의 고위 임원으로부터 받았다. “한국 자동차부품 업체가 국제 협력이 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요즘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주목받는 이스라엘 부품 기업보다 한국 업체들의 사업 역량이 강하다는 게 내 판단”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실질적으로 해외 기업과 협력을 모색하는 한국 기업, 해외 기업들이 파트너로 선택할 수 있는 한국 기업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원인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준 폐쇄적인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 부품 공급업체들은 특정 완성차 업체에 의존해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기반이 강하다. 미래차 관련 산업도 균형 있게 발전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미래차 관련 기업들은 한국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 국내 부품업체로서는 세계로 발돋움할 기회다. 완성차 업체가 정점에 있던 자동차산업 구조 자체가 뒤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준 폐쇄적인 국내 거래구조를 체질 개선할 적기가 찾아왔다. 미래차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정부가 눈여겨볼 부분이다. 나아가 자동차 업체와 헬스케어, ICT 기업 간의 협력을 활성화한다면, 우리나라가 미래차 산업을 주도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이항구 선임연구위원

산업연구원에서 20년간 자동차 산업 분야를 연구했다. 한국자동차산업학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친환경차 전략포럼 총괄위원, 국토교통부 자율주행자동차 융복합 미래포럼 위원을 맡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