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양다리 외교’가 더 절실해졌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지난달 말 미국 워싱턴 정가는 언론에 유출된 공화당 선거전략 문건으로 크게 술렁거렸다. 이 57쪽짜리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는 “연말 대선 및 상·하원 선거에서 이기려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옹호 대신 ‘중국 때리기’에 집중하라”는 것. 중국을 코로나19 사태의 원흉으로 몰아야 적 앞에서 뭉치는 ‘결집 효과’가 극대화한다는 논리였다. 코로나19 책임론을 빌미로 불붙은 중국 때리기가 실은 대선 전략의 일환이었음이 드러난 거다. 이런 터라 ‘이번 사태가 우한연구소에서 배양하던 바이러스가 유출되는 바람에 터졌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미국의 대중 공격은 갈수록 격렬해질 게 틀림없다.

미, 코로나19로 ‘중국 때리기’ 격화 #미·중 격돌 시 한국 입장 어려워져 #친미·친중 함께하는 균형외교 필요

게다가 백악관에는 반(反)중국파가 다수 포진해 있다. 최선봉에 선 인물은 매튜 포틴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 동아시아 정책을 주무르는 그는 7년간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중국 정부의 비민주적 행태를 목격했다. 당시 포틴저는 공안에 체포되고 중국 비리를 캤다는 이유로 얼굴을 두들겨 맞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 시진핑 정권을 싫어하게 만들었다는 게 본인의 회상이다. 그뿐이 아니다. 중국 여행 금지를 끌어낸 스티브 밀러 정책고문, 대중 경제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피터 나바로 무역·제조업정책국장도 포틴저 못지않은 반중 인사다. 가뜩이나 선거 전략상 ‘중국 때리기’가 절실한 판에 이들 반중 3인방까지 활개를 치면 미·중 관계는 냉전 이후 최악으로 떨어질 공산이 크다.

실제로 트럼프는 코로나19가 퍼지자마자 중국인 입국을 막은 데 이어 공무원연금의 중국 기업 투자 및 전력망 관련 중국산 설비 사용 금지 등을 실행할 태세다. 나아가 중국이 보유 중인 미 국채의 일부를 아예 갚지 않는 초강수마저 검토하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지 못한 책임을 중국에 묻겠다는 거다.

중국도 가만있을 리 없다. 중국은 거꾸로 미 국채를 한꺼번에 내다 파는 보복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중국 보유 물량이 한꺼번에 풀리면 미국이 국채 매각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진다.

이렇듯 미·중 신(新)냉전이란 먹구름이 몰려오면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기대 온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양국은 제 편에 서라고 한국을 죄어올 게 뻔하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는 대중 보복조치에 참여하라고 유럽의 동맹국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럴 경우 우리가 취해야 할 대책은 뭘까.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건 ‘균형 외교’ 전략이다. 국제정치학계 원로인 한승주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이 역설하는 이 방안의 핵심은 미국과의 동맹국, 중국과의 우호국 관계 모두를 가져가자는 거다. 예컨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동참하면서도 중국이 자기 세력을 넓히려는 ‘일대일로 사업’에도 기꺼이 힘을 보태자는 얘기다. 거칠게 말하면 양다리 외교 전략이다.

친미·친중 모두를 동시에 추구하자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외교를 하면서 속내까지 뒤집어 보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얼마든지 양쪽 모두에 진정성 있게 보일 수 있다. 무릇 훌륭한 외교란 서로 모순돼 보이는 대외정책들도 매끄럽게 이뤄내는 거다.

조선시대 최고의 외교를 편 왕으로 평가받는 이는 광해군이다. 형제를 죽이고 계모를 폐위시켜 폭군으로 불리지만 그는 후금이 흥하고 명이 기울던 17세기 초, 중립적인 실리외교로 국익을 챙겼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명이 지원군을 요청하자 1만3000명을 보냈다. 그러면서 장수 강홍립에게 정세에 맞게 처신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강홍립은 명의 휘하에 있으면서 후금과도 소통해 양국 간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다. 도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적 사고로는 있을 수 없지만 실리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친미·친중의 양극단으로 갈려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 작금의 세태에선 되씹어 봐야 할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