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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경영 분리하겠다는 삼성, 스웨덴 발렌베리 모델 따를까

중앙일보

입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와 노조 문제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제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와 노조 문제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제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선진 기업 모델에 관심이 쏠린다.

가장 먼저 주목받는 건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이다. 발렌베리는 스웨덴 국내 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거대 기업집단이다. 5대(代) 160년 동안 한 가문이 소유하고 있지만, 소유와 경영의 철저한 분리로 ‘가문 경영’의 롤 모델로 여겨진다.

5대 수장(首長)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 회장은 지난해 12월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에서 “발렌베리의 경영 모델은 장기적 안목을 갖고 투자하며, 재단을 통해 기업 경영에 참여하고 산업 생태계를 만들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유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발렌베리 가문

발렌베리 그룹 지배구조.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발렌베리 그룹 지배구조.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의 말대로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대표 기업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지만 직접 지배하지 않는다. 발렌베리그룹의 모든 지분은 발렌베리 재단이 갖고 있으며 재단은 다시 재산관리회사인 팜(FAM·Foundation Asset Management)AB를 통해 비상장 기업들을 지배한다. 세계 최대 베어링 업체인 SKF, 항공사 SAS그룹, 유럽 최대 제지업체 스토라엔소 등이 산하에 있다.

재단은 또 55.2%의 의결권을 가진 지주회사 인베스터AB를 통해 에릭손(통신)·사브(항공·자동차)·아스트라제네카(바이오·제약) 등 상장기업을 소유한다. 인베스터AB는 사모펀드인 EQT와 자회사 파트리샤 인더스트리즈를 통해 다른 상장·비상장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철저한 능력 검증을 통해 금융부문과 사업부문 각 한명씩 2명의 후계자를 뽑는다. 5대째에는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회장과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AB 회장이 대표 선수다. 이들은 재단 이사회 일원으로 경영에 참여한다. 이들은 배당금을 받지만 배당금은 모두 재단으로 귀속되며, 이 중 80%를 연구·개발(R&D)에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지난해 12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 하고 있다. 이동현 기자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지난해 12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 하고 있다. 이동현 기자

재단을 통한 경영이어서 개인 재산이 거의 없는 점도 특색이다. 발렌베리 가문 두 수장의 급여는 연 수억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과는 이건희 회장 때부터 대를 이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방한 때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별도 만남을 갖기도 했다.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은 “이 부회장과 나는 오랜 친구”라고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말했다.

위기 때만 나타난다 ‘은둔 경영’ 콴트 가문

삼성 내부를 잘 아는 전 고위 관계자는 “삼성은 2000년대 이후 오랫동안 해외 기업 지배구조를 연구해 왔다. 발렌베리 뿐 아니라 BMW그룹, 미쉐린, 포드, 도요타도 케이스 스터디(사례 연구)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인 독일 BMW그룹 역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기업으로 몰려 영업이 중단됐던 BMW는 ‘라이벌’ 메르세데스-벤츠에 인수될 위기에 몰렸다.

헤르베르트 콴트 전 BMW그룹 대주주. 중앙포토

헤르베르트 콴트 전 BMW그룹 대주주. 중앙포토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게 콴트 가문이다. 섬유업으로 부를 쌓은 콴트 가문은 BMW 지분의 48%를 사들였고 최대 주주가 됐다. 1950년대 해외 자동차 기업의 적대적 인수를 막아낸 콴트 가문은 철저하게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경영을 맡는 경영이사회와 이를 견제하는 감독이사회로 나눠 어느 한쪽의 독주를 막는다. 마케팅과 R&D 등 일상적 경영은 물론, 인수·합병(M&A) 결정도 경영이사회가 맡지만, 위기 상황이 닥칠 때는 아주 드물게 콴트 가문이 개입한다.

50년대 적대적 M&A 시도가 있었을 때 헤르베르트 콴트 대주주가 감독이사회를 통해 이를 저지했다. 90년대 영국 로버그룹 인수 이후 적자가 쌓였을 때도 콴트 가문 2세들이 개입해 당시 경영진을 용퇴시켰다.

독일 내에서도 콴트 가문은 ‘침묵의 경영자’ ‘은둔의 경영자’로 불린다. 미디어와 접촉을 피하고 공식적인 발표에도 나서지 않는 게 원칙이다. 1대 헤르베르트 콴트 사망(1982년) 이후 세 자녀는 재산전문관리회사를 통해 상속지분을 소유하고, 감독이사회에만 가문 대표가 이사로 참여한다.

초유의 소유·경영 분리 실험 어떻게 될까

 BMW그룹은 독일 3대 자동차 회사 가운데 가장 지배구조가 안정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대주주 가문이 안정적으로 소유하면서 전문경영인이 경영하는 시스템을 이어가고 있어서다. 독일 뮌헨의 BMW그룹 본사 사옥 모습. AFP=연합뉴스

BMW그룹은 독일 3대 자동차 회사 가운데 가장 지배구조가 안정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대주주 가문이 안정적으로 소유하면서 전문경영인이 경영하는 시스템을 이어가고 있어서다. 독일 뮌헨의 BMW그룹 본사 사옥 모습. AF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삼성의 4세 승계 포기 선언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초유의 실험이 될 것으로 본다. 발렌베리나 BMW의 사례가 참고될 수는 있지만 삼성에 직접 적용은 어렵다. 한국과 스웨덴·독일의 각종 법규가 다르고, 이미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와 달리 이들 기업은 수십 년 전 이미 지배구조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4세 경영을 포기하겠다는 건 엄청난 선언이며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도 기업 경영에 대한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결국 기업의 성패는 혁신”이라며 “조지프 슘페터의 이론처럼 ‘자본주의는 혁신이 있을 때 성장하고, 혁신이 없으면 불평등만 남게 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도 “경영권 세습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차등 의결권 도입이나 비영리 재단에 의한 기업 지배를 허용해 편법 승계를 하지 않도록 정부와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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