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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코로나 시대의 서예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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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서양과 구별되는 동양 미술의 특징을 꼽으라면 글자를 쓰기 위한 붓으로 그림 역시 그린다는 것이다. 서예작품 속 필획은 그 굵기와 길이, 먹의 농담과 운필의 속도를 통해 붓을 잡은 서예가의 성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서예의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다루는 서예가 예술인가’라는 우문에 직면해 일제시기에는 제도권 미술에서 배제됐으며, 해방 후 국전에 서예부가 부활하여 저변화에는 성공했으나 서양화의 위력 앞에 주변부 미술로 밀려나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관에 書’전에는 역사적 부침에 따라 존립을 도전받아왔던 한국 서예계의 고심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예’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든 손재형, 한글·한자 서예의 병용을 주창한 김충현은 물론, 훈민정음 해례본을 근간으로 독자적 한글 서체를 이룬 서희환, 전각에 일가를 이룬 이기우와 고봉주에 이르기까지 12인의 작가를 조명함으로써 서예를 현대 미술사의 지형 안에서 자리매김한 것은 본 전시의 의의라 하겠다.

이응노, 구성, 1968년, 종이에 먹, 33x126.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응노, 구성, 1968년, 종이에 먹, 33x126.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 서예의 예술적 확장에 있어 추상표현주의의 유입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잭슨 폴록, 마크 토비 등 한자를 모르는 작가들에게도 서예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영감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읽는 서예’로부터 ‘보는 서예’로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텍스트의 의미로부터 해방된 서예는 추상조각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최만린은 서예의 역동적이고 거친 필선을 철제 조각이나 시멘트로 형상화했다. 이응노의 ‘구성’은 동백림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 복역 중 제작한 회화로, 거칠고 불규칙한 필획이 세월에 깎이고 마모된 비석의 필세를 연상시킨다(사진).

해방 후 등장한 한글 서예의 성과 역시 주목할 만한데, 한글 전용을 강조했던 박정희 정부의 국가주의적 민족문화 중흥책이 뒷받침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시대 왕실과 궁녀들이 사용하던 둥글고 부드러운 궁체·봉서체가 확산되는 한편, 사대부 편지글 서체에 뿌리를 둔 최민렬, 서민들의 필사본 소설·가사의 질박한 ‘민체’에 바탕한 여태명의 개성적 서체는 한글 서예의 외연을 확장했다.

중국의 경우 문화 대혁명기 회화 제작을 금지당한 채 농촌에 하방된 화가들은 서예에 몰두함으로써 예술혼을 분출하였고, 1980년대 이후 서예는 중국 현대미술의 ‘중국적 미학’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예란 단순히 붓으로 쓰여진 검은 색 글자가 아니다. 문자가 창제된 이래 3000년간 필획 속에 쌓여 온 응축된 시간이자 그 시간을 견뎌온 힘이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먹의 생명력은 학예사의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진 온라인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youtube.com/MMCA Korea)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