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개별연대 당시 고속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본인을 앞세우는 걸 꺼렸고 경제 정책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조정자 역할에 충실했다.”
25일 별세한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에 대해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강 전 부총리는 “ (김 회장이) 대통령 비서실장 재직 시절에 외부 인사와의 약속도 일절 잡지 않았던 거로 기억난다”며 “대신 온화하고 원만한 성품으로 경제 관료들이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원했다”고 전했다. 김 회장이 비서실장일 때 강 전 부총리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물가정책국장,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기획차관보 등을 지냈다.
‘최장수 비서실장(69년 10월~78년 12월)’으로 잘 알려진 김 회장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토대를 쌓은 인물로 꼽힌다. 김 회장은 박정희 정부 당시 경제부처 장관과 '경제통' 비서실장을 지내며 수출 주도형 성장, 중화학공업 부흥 등을 이끌었다.
화폐개혁 주도, 한은의 '현대화'기여
김 회장은 44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입행했다가 강제 징집돼 잠시 군인의 길을 걸었다. 52년 준위로 예편한 뒤에는 한은 조사부 차장, 재무부(현 기재부) 이재국장 등을 맡았다. 그러면서 한은이 ‘현대 중앙은행’의 모습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 53년과 62년 단행된 1‧2차 화폐개혁을 입안하는 역할도 했다.
66년 재무부 장관, 67년 상공부 장관을 맡으며 수출 주도, 공업 고도화 정책을 주도한 김 회장은 69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의 길을 걸었다. 당시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른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니다”라는 김 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나는 경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경제 문제는 비서실장이 잘 챙겨달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탁월한 조정자'…막힌 정책은 말끔히 뚫어주기도
박 전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측근으로 김 회장은 당시 한국 경제의 '설계자' 역할을 했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대통령이 큰 그림을 그렸지만, 중화학공업 중심의 성장은 김 회장이 설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 회장은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다. 김 회장은 회고록『아, 박정희』를 통해 “청와대 비서실을 구성하는 수석비서관·비서관·행정관은 대통령의 그림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대통령이란 큰 나무의 그늘에서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일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비서실 직원이 명함을 외부에 뿌리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는 청와대 로고가 새겨진 봉투를 외부에 갖고 나가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대신 정책 입안 과정에서 각 부처 혹은 이해 당사자 간 갈등이 빚어질 때 탁월한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다는 게 후배 공무원들의 평가다.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김 회장은 ‘비서는 자기 목소리를 직접 밖으로 내면 안 된다’고 늘 강조했다”며 “대신 경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드러나는 부처 간 이해 상충 및 대립 문제를 항상 합리적으로 조정·조율했다”고 말했다. 그는 “장관들이나 은행장들이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을 때는 항상 김 회장을 찾아갔고, 김 회장은 이를 말끔하게 해결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한국 경제의 설계자였지만, 몸을 낮춘 조정자로 일한 김 회장으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산업고도화 정책을 빠르게 추진할 수 있었다. 농업개발,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의료보장제도 등 한국 사회 전체가 도약하는데 큰 역할을 한 주요 정책들도 이 무렵에 기틀을 갖췄다.
김 회장이 경제 관료로, 비서실장으로 경제 정책을 이끄는 동안 한국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53년 67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박정희 정부 마지막 해인 79년 1510달러로 껑충 뛰었다. 윤 전 장관은 "김 회장은 한국 경제 산업화의 숨은 조력자이자 최대 공로자로 많은 후배 공직자들의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하남현·임성빈 기자 ha.nam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