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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탱크가 꽉 찼다…원유 내려 놓을 곳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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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코로나19에 휘청대는 정유업계

SK에너지 울산공장 육상출하장. 코로나 사태 전 제품을 싣는 탱크로리로 붐볐으나 지금은 절반도 차지 않았다. [사진 SK에너지]

SK에너지 울산공장 육상출하장. 코로나 사태 전 제품을 싣는 탱크로리로 붐볐으나 지금은 절반도 차지 않았다. [사진 SK에너지]

“내일모레 유조선이 들어옵니다만, 기름 내릴 곳이 없습니다. 한 달쯤 바다 위에서 띄워놓아야 합니다. 15억원의 비용이 듭니다.”

제품 만들수록 손해, 가동률 낮춰 #항만 도착 유조선 바다에서 대기 #이익 높은 고도화 시설마저 감산 #업계 “생존 위태, 세제 지원 절실”

10일 울산광역시 남구 용연동 SK에너지 원유저장 시설. 저 멀리 부이(Buoy·원유하역시설)가 떠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SK에너지 생산관리실 전길배 부장의 얼굴에는 허탈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전망대에서 본 거대한 원유 탱크의 부유식 지붕(플로팅 루프)은 대부분 상단까지 올라와 있었다. 원유가 꽉 차 있다는 뜻이다. 플로팅 루프는 저장된 원유의 높이에 맞춰 오르내리기 때문에 한눈에 저장량을 짐작할 수 있다. 모두 34기의 탱크가 있는 이곳은 하루 84만 배럴의 원유를 처리하는 국내 최대 정유사 SK에너지의 생산 공정이 시작되는 곳이다.

위기감 가득한 정유공장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정유업계의 어려움은 원유 저장소 찾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수요 감축으로 생산이 줄었지만, 장기 계약에 따라 유조선은 계속 도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울산 CLX(컴플렉스·복합생산시설) 내의 적정 재고량은 850만 배럴 정도지만, 벌써 1200만 배럴 이상이 차 있어 여유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정기 보수에 들어갔거나 공정에 투입된 탱크를 제외하면 사실상 ‘풀(Full)’ 상태라는 설명이다. SK에너지는 정부가 빌려준 충남 서산 석유비축기지에 180만 배럴을 돌렸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해 유조선을 바다에 대기시킬 수밖에 없다. 배 크기에 따라 하루 5000만~1억원이 든다.

추락하는 정제마진

추락하는 정제마진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발열 체크를 받고 들어선 공장에서는 곳곳에서 위기감이 느껴졌다. SK에너지는 3월 들어 가동률을 85%로 낮췄다. 제품을 만들어봤자 손해만 쌓이기 때문이다. 3월 셋째 주부터 정제마진(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가·수송비·운영비 등을 뺀 금액)이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 백부기 CLX대외협력실장은 “수출 타격이 본격화하는 6~7월쯤에는 공장 가동률을 60~70%대로 낮춰야 할 것 같다”며 한숨지었다. 우리나라 정유업체들은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수요 급감의 현장은 육상 출하장과 해상 출하장(수출부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휘발유·경유·LPG·항공유·아스팔트 등을 싣고 전국으로 출발하는 탱크로리로 붐벼야 할 육상 출하장은 썰렁했다. 회사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 전 하루 300~500대가 들락거렸으나 지금은 150~200대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수출용 제품을 적재하는 해상 출하장도 휑하기는 마찬가지. 기자가 부두를 찾은 시간, 다섯 개의 부두에는 단 한 대의 선박만이 접안해 있었다. 시설을 안내한 전길배 부장은 “두어 달 뒤에는 부두가 아예 비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 부장은 “바이어들에게는 계약 물량의 5% 정도를 더 싣거나 줄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요즘은 하나같이 줄여달라는 요구만 들어온다”고 말했다.

자금난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

당장 생존을 걱정하는 정유업계는 재고 처리에 골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항공유다. 국내 정유사의 생산 중 14% 정도를 차지하는 항공유는 대표적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하지만 3월 들어 항공유 수요는 70% 이상 급감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 같아 SK에너지는 항공유 생산 공정을 아예 다른 유종으로 전환하고 있다.

고도화 설비도 마찬가지다. 부가가치가 낮은 벙커C유 등을 재투입해 휘발유·경유·등유 등을 만드는 고도화 설비는 수익성이 좋아 항상 100% 가까운 가동률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마저 6월쯤 되면 가동률을 70% 정도로 낮출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길배 부장은 “입사 30여 년 동안 보수나 사고 외의 이유로 고도화 설비 가동률을 낮춘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유업계는 수요 감축 압력의 돌파구로 국제원유시장의 감산을 기대하고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러시아 등 23개국이 참가하는 오펙플러스는 하루 감산량을 970만 배럴로 합의했다. 그러나 하루 3000만 배럴로 추정되는 수요 감소량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원유 가격 급락은 정유사의 재고 평가 손실로 곧바로 이어진다. 2월 하순만 해도 50달러 선이던 두바이유 등이 최근 20달러 선까지 내려오며 정유사의 재고 손실은 수천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 수요 급락까지 겹치며 국내 4대 정유사의 1분기 영업 손실은 2조5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이 길어질 경우, 자금력이 좋은 정유업계마저 자금난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짙어지고 있다.

“기간산업 지원해야” 정부 대책 호소

SK에너지 해상출하 부두. 수출 물량이 급감하면서 부두가 썰렁해졌다. [사진 SK에너지]

SK에너지 해상출하 부두. 수출 물량이 급감하면서 부두가 썰렁해졌다. [사진 SK에너지]

정유사들은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투자를 보류하는 등 비상 대응에 나섰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은 여수 공장의 정제설비 정기보수를 예정보다 앞당겨 실시하기로 했다. 이미 연초부터 가동률을 80% 수준으로 낮춘 에쓰오일은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 실시를 검토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종합화학은 프랑스 화학업체 아르케마의 폴리올레핀 사업부 인수 계약 일정을 다음 달 말로 연기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내몰린 정유업계는 이 정도 대응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국가 기간산업인 정유업계를 돕기 위해 나서긴 했다. 정유사에 한국석유공사의 원유 비축기지를 제공하고, 4~6월분 석유수입·판매부과금 징수를 90일간 유예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유업계는 이 정도 지원은 ‘신발 신고 가려운 데 긁는 격’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정유업계가 요구하는 지원의 핵심은 세금 제도다. 세율 3%인 원유수입 관세를 한시적으로라도 폐지하거나 축소하고, 석유수입부과금은 유예가 아닌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수입 LPG에는 부과하지 않는 석유수입부과금을 원유에 부과하는 것은 역차별이라고 주장한다. 개별소비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도 감면 혹은 탄력세율 적용 등의 ‘통 큰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요구에 대해 기획재정부 등은 ‘쉽지 않다’는 반응이다. 전체 세수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사마다 개별적으로 대관 업무를 강화하고 있으나, 업계 차원에서 공식적 요구에 나서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라고 전했다. 대기업에 대한 지원 요구가 자칫 역풍을 맞지 않을까 걱정하는 기류도 있다. 특히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21대 총선 결과는 업계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지원이 소극적일 경우 자칫 국가 기간산업이 흔들리게 된다”며 정부의 적극적 관심을 촉구했다.

정부, 세금 유예는 ‘OK’ … 면제·축소는 ‘글쎄’

정유업계가 특히 세제 지원이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에너지 산업 관련 세금의 규모와 특성 때문이다. 한국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지만, 정유설비 세계 6위(2017년), 석유제품 소비량 세계 8위(2018년)일 정도로 석유의존도가 높다. 정유산업의 GDP 비중(2.1%)도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3위를 차지한다.

높은 석유의존도는 세수로 이어지고 있다. 2017년 국세총수입(265조원) 중 에너지세는 23조원으로 9%를 차지했다. 지방세·주행세 및 준조세인 석유수입·판매부과금을 합하면 에너지 관련 세입은 28조원에 달한다. 더구나 에너지세는 간접세로 조세 저항이 거의 없어 안정적 세수가 필요한 정부로서는 놓칠 수 없는 세원이다.

원유가가 떨어져도 주유소에서 넣는 휘발유·경유 값이 내려가지 않는 이유도 바로 세금 때문이다. 휘발유 1L에는 교통·에너지·환경세가 정액으로 529원이 붙는다. 이를 기초로 교육세와 주행세가 붙고, 여기에 다시 세후 공급가의 10%인 부가가치세 등이 가산된다. 한국석유공사 유가 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나타난 4월 셋째 주 휘발유 평균 가격은 리터 당 1330.8원이었는데, 이중 세금이 851원 정도다.

정부는 정유업계의 유동성 위기 극복을 위해 정유업체에 유류세 납부를 3개월 미뤄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수입 관세 폐지·축소, 석유수입부과금 인하, 원료용 중유 개별소비세 면세 등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신중한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런 정부 입장은 국가 기간산업인 정유업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