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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는 '명랑 트로트' 국경을 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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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호 18면

TV조선 ‘미스터트롯’. [중앙포토]

TV조선 ‘미스터트롯’. [중앙포토]

“어떻게 트로트 따위를 들을 수 있어? 젊은 애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트로트는 못 불러, 나 아티스트야!”

신파 대신하는 날것의 욕망 담아내 #사라진 미풍양속·‘올드패션’ 소환 #콘텐트 업그레이드로 젊은 팬덤까지 #신구세대 대동단결 ‘화합의 아이콘’

2014년 KBS 드라마 ‘트로트의 연인’에서 자칭 ‘음악의 신’이라는 남주인공(지현우)의 대사들이다. 기고만장하던 ‘음악의 신’은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성숙해진 뒤 월드스타 반열에 오르고, ‘트로트의 여왕’이 된 여주인공(정은지)과 노숙자 쉼터에서 ‘님과 함께’를 부르며 드라마가 끝난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 트로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장르다.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예능이건 광고건 트로트 천지다. 종편 최고 시청률(35.7%)을 기록한 TV조선 ‘미스터트롯’에서 ‘탑7’에 든 영탁·이찬원·장민호 등은 방송사를 넘어 예능 프로그램 섭외 1순위가 됐다. ‘진’ 임영웅이 찍은 자동차 광고의 카피 ‘인생이 막 재밌어지기 시작했다’도 화제다. 후속 프로그램인 ‘신청곡을 불러 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는 시작부터 23.1%를 찍었다. SBS ‘트롯신이 떴다’ 역시 베트남에서 트로트 버스킹에 성공하며 인기몰이에 가세했다.

SBS ‘트롯신이 떴다’. [사진 SBS]

SBS ‘트롯신이 떴다’. [사진 SBS]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홍진영의 개인방송 ‘쌈바홍’은 구독자가 60만 명에 달하고, 주현미가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옛 노래를 들려주는 ‘주현미TV’도 호응이 뜨겁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일인 트로트 가수도 있고, 트로트에 맞춰 아이돌 댄스를 추는 아프리카 청년들과 러시아 소녀들도 있다.

트로트는 공연시장도 움직이고 있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지난해 콘서트 매출은 10.7% 늘었는데, 트로트 장르가 부활해 새로운 시장을 만든 것이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실제로 ‘미스터트롯’ 전국 투어 콘서트는 예매 시작 10분 만에 서울 공연 2만석이 전석매진됐고, 지방공연까지 총 4만석이 모두 팔렸다. 예매 관객의 43.3%가 20대로 가장 많았고, 30대가 36.5%로 뒤를 이었다. ‘트로트 열풍’이 올 상반기 가장 뜨거운 문화 현상이 된 것이다.

1980년대만 해도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현철의 ‘봉선화 연정’ 등 메가 히트곡이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90년대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젊은 세대가 대중음악 시장을 주도하면서 트로트는 침체에 빠졌다. 주류 대중문화인 방송에서 거의 사라지고, 고속도로 휴게소·밤무대 업소·칠순잔치·유세현장 등 언더그라운드에서 ‘유흥 문화’로 명맥을 이어왔다.

신구세대 화합의 아이콘으로 부상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은 밑바닥에 있던 트로트를 단숨에 주류로 끌어올렸다. 팬덤 문화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킨 Mnet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듀스101’을 벤치마킹해 중장년은 물론 노년 팬덤까지 폭발시켰고, 특이하고 새로운 문화에 목마른 젊은 세대까지 유혹했다.

트로트의 부활은 음악 장르의 문제를 넘어선다. ‘미스터트롯’ 포맷에 숨겨진 전략은 효·부부금슬·예의바름 같은 ‘잊혀진’ 미풍양속을 비롯해 칠전팔기·남자다움·굶주림의 애환 같은 ‘올드패션’ 문화코드의 소환이다. 젊은 출연자가 부모와 조부모를 언급하며 눈물을 보이고, 객석을 점령한 중장년층에게 구애의 꽃송이를 내밀며, 시청자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 낯선 풍경 역시 신구세대간 화합의 코드로 작용했다.

온가족이 모여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이 조회수 34만을 돌파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댓글에는 “우리집 모습과 똑같다”는 평이 줄을 잇는다. 각자 스마트폰을 쥐고 흩어졌던 가족을 TV 앞으로 한데 모아 ‘트로트로 대동단결’시킨 셈이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음악사에서 세대갈등의 강약은 늘 반복되어 왔다.  서태지처럼 젊은 기운과 창의성 넘치는 새로운 음악이 치고 나올 때도 있지만, 옛날 것이 뜨는 것은 안전함을 추구할 때다. 젊은 가수들이 자기 취향의 음악을 고집해서는 돈을 벌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가 유행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화권력의 대이동’도 트로트 열풍이 만든 현상이다. 문화향유와 거리가 멀었던 중장년층이 음원 스트리밍에 열을 올리며 대중음악 시장의 중심에 있던 10~20대를 밀어낸 것이다. ‘미스터트롯’의 생방송 시청률(35.7%)과 문자투표수(773만)는 ‘프로듀스101 시즌2’의 그것(18%, 120만)보다 월등히 높았다.

유재석은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했다. [중앙포토]

유재석은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했다. [중앙포토]

중장년층이 지갑을 열게 된 대상이 트로트라는 사실은 과도하게 현란해진 대중음악에 대한 반발로도 풀이된다. 쉬운 가사와 단순한 리듬, 반복적인 선율로 음악성이 떨어진다고 평가 받았던 트로트가 외려 대세가 된 것이다.

이영미 평론가는 “트로트도 초기에는 대도시에서 신교육을 받은 10대 중산층이 즐기는 고상하고 복잡한 음악이었지만, 일본에서 들어온 비서구적인 것으로 폄훼되고 60~70년대 팝음악과 포크송에 밀려 하층민의 문화로 옮겨갔다”면서 “유재석이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한 MBC ‘놀면 뭐하니’를 통해 트로트가 전문적인 영역으로 비춰지고 경연을 통해 트로트를 분석적으로 보게 된 면도 있지만, 요즘 트로트는 욕망을 날것으로 털어놓는 희열과 해방감이라는 하층민 정서가 핵심이 됐다. 지금의 인기는 삶이 너무 힘드니 밑바닥 욕망을 드러내는 막장의 쾌감을 추구하는 데서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서민의 애환을 달래준다’는 트로트의 기본 정서도 ‘이 풍진 세상’에 가수와 팬덤 사이를 끈끈하게 하고 있다. 젊은 가수들은 반짝이 의상 뒤로 어딘지 고생이 묻어나는 ‘n포 세대’로서 각자 실패나 시련의 경험이 스토리텔링됐고, 절실한 각오로 임한 모든 무대는 독특한 비장미로 눈물과 감동을 생산했다.

기존 관념 깨고 타장르와 섞이며 부활

트로트 ‘최고최고’에 맞춰 군무를 추는 아프리카 청년들. [사진 유튜브 캡처]

트로트 ‘최고최고’에 맞춰 군무를 추는 아프리카 청년들. [사진 유튜브 캡처]

사실 트로트는 원래 신파였다. 1930년대 초창기 트로트곡들은 일본 ‘엔까’의 번안가요로 시작되어 그 양식이 정착됐는데, 엔까의 핵심은 절절한 비애감이다. ‘라시도미파’ 단조 5음계에 2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엔까와 흡사한 형태로 태동한 트로트도 구슬픈 애상의 정서로 향수나 이별을 노래했다.

하지만 트로트는 더이상 신파가 아니다. 80년대 중반 등장한 주현미는 가볍고 경쾌한 리듬과 창법으로 트로트를 ‘분위기 띄우는 노래’로 포지셔닝시켰다. 2000년대 장윤정·박현빈·홍진영 등 젊고 세련된 가수들이 등장하고 슈퍼주니어나 빅뱅 같은 아이돌까지 ‘신나는 트로트’에 일조하면서, 신명나는 ‘명랑 트로트’의 시대가 개막했다. 특히 2010년대 초반 중대한 변곡점이 생기는데, 그 중심에 KBS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있다. ‘전설’로 박제된 트로트 명곡들을 젊은 세대에 소구하는 댄스·발라드·EDM 등 타장르와의 혼성 편곡과 다양한 악기편성으로 신선하게 재해석해 되살려내며 변신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이후 국악기와 협업한 이애란의 ‘백세인생’(2013), EDM과 결합한 김연자의 ‘아모르파티’(2017)는 젊은 층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 열풍의 비밀도 콘텐트 업그레이드의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미스터트롯’에서도 가창력과 ‘뽕필’로 승부하는 정통식 무대도 박수를 받았지만, 기존 형식과 고정 관념을 파괴하는 창의적 무대에 반응이 더 뜨거웠다. ‘레전드’로 출연한 설운도가 “이게 내 노래 맞냐”고 자꾸 물었을 정도로, 폴댄스·태권댄스 같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동원하며 새로운 쇼문화의 가능성까지 점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혼성화와 장르파괴를 ‘트로트의 종말’로 보는 시각도 있다. 5음계 중심의 뚜렷한 음악적 특징과 ‘신파’라는 본질적 정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영미 평론가는 “트로트의 본질인 신파는 근대 초기 억압받던 동아시아 사회의 산물로 권위주의적 세상에서 통하던 건강하지 못한 정서였다”며 “요즘 트로트 인기의 핵심은 고상한 음악에 없는 독특한 해방감인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음악의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콘텐트를 포장하는 미디어의 힘도 주목할 만하다. 음악인류학자인 김희선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은 “트로트는 실제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비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예술로서의 지위도, 팬덤도 얻지 못한 가장 낮은 수준의 음악으로 여겨져왔다”면서 “지금의 열풍은 음악이 얼마나 사회적·문화적 산물인지 보여준다. 아이들까지 트로트를 소비하게 된 것은 촌스럽게 보이던 것을 힙하게 포장해 소외계층과 유흥 코드를 벗어난 색다른 지점에서 활로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런 면에서 K트로트의 잠재력은 크다.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14.1%)을 기록한 SBS ‘트롯신이 떴다’가 베트남에서 성공한 것도 한류의 일상화로 베트남인들이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현실이 배경이 됐다. 김희선 실장은 “이박사 뽕짝이 처음 나왔을 때 미국 음악 전공자들에게 들려주니 대번에 반응이 나왔다. 문화적 맥락 없이 사운드만으도 춤추기 좋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류의 흐름이 없어 트로트가 노출되지 않았다면, K콘텐트가 전세계를 휩쓸며 일상화된 지금 K트로트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전망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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