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1000만원 받기까지···바닥엔 사람 대신 A4 빼곡히 줄섰다

중앙일보

입력 2020.04.06 05:00

업데이트 2020.04.06 11:06

66만6163개. 국내에 있는 기업체 수(2017년 기준)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셈입니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기 전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중앙일보의 새 디지털 시리즈인 [기업 딥톡(Deep Talk)]에선 대한민국 기업의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꿈ㆍ희망ㆍ생활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3일 새벽 경기도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수원센터 앞 바닥에 붙은 A4용지들. 새벽부터 몰려든 대기자들이 긴급자금 대출 지원 신청을 위해 순서대로 붙여놓은 것이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도 50명 이상의 사람이 몰렸다고 한다. 사진 이동호 대표

3일 새벽 경기도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수원센터 앞 바닥에 붙은 A4용지들. 새벽부터 몰려든 대기자들이 긴급자금 대출 지원 신청을 위해 순서대로 붙여놓은 것이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도 50명 이상의 사람이 몰렸다고 한다. 사진 이동호 대표

대출센터 바닥엔 빼곡한 A4용지 줄

3일 새벽0시30분쯤 경기도 수원시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수원센터(이하 수원센터) 앞 바닥엔 A4용지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종이에는 전화번호와 사람 이름, 번호가 적혀 있다. 모두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코로나19 긴급자금을 대출받기 위한 대기 줄이다. 접수는 오전 7시부터 시작이지만, 대출 신청자가 워낙 많다 보니 전날 자정부터 A4용지들이 사람을 대신해 줄을 서고 있다.

[기업딥톡⑬] 3번째 인생 파고 넘는 이동호 유원솔루텍 대표의 스토리

블랙박스용 보안솔루션 업체인 유원솔루텍㈜의 이동호(55) 대표도 이곳에 새벽 0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대기 순번은 57번. ‘밤을 새울’ 각오로 단단히 차려입고 집을 나섰지만 50번이 넘었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미 지난 1일에도 50명까지만 자금 대출 상담이 이뤄져 허탕을 친 터였다.

하지만 이날은 70명까지 상담해준다는 이야기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대표는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적은 종이를 바닥에 단단히 붙인 뒤 귀가했다. 잠깐 눈을 붙인 뒤 오전 6시 30분에 다시 수원센터로 와 상담과 접수를 마쳤다. 이 대표는 “상담을 받은 결과 이번 주 중에 긴급자금 1000만원을 대출받기로 했다”며 “이걸로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블랙박스용 보안 솔루션 만드는 유원솔루텍의 이동호 대표가 2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제과학진흥원 경기벤처창업센터 내 사무실에서 시제품 테스트를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블랙박스용 보안 솔루션 만드는 유원솔루텍의 이동호 대표가 2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제과학진흥원 경기벤처창업센터 내 사무실에서 시제품 테스트를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종소기업인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 대표도 그렇다. 그에게 코로나19 사태는 세 번째 위기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당시 그는 대우그룹에 다녔다. 그룹은 무너졌지만, 나이도 젊고, 직급도 높지 않아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그가 몸담고 있던 대우통신 방산부문은 STX엔진에 매각됐다. STX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을 찾는가 싶었던 그의 커리어는 10여년 만인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도 앞에 다시금 요동치게 됐다. 2012년 말 구조조정으로 결국 회사를 나왔다.

영업활동 사실상 중단돼 

그는 “사업을 시작한 건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내 의지대로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업 아이템인 블랙박스용 보안솔루션은 우연히 국방부 앞을 지나다 ‘(보안을 위해) 출입 시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 전원을 빼거나 SD카드를 빼라’는 안내문을 본 게 계기가 됐다. "저렇게 해선 보안이 안 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차린 건 2017년 1월이다.

그간 기술력을 쌓고 발전소와 군부대, 기업 연구소 등을 찾아다니며 잠재 고객이 될 사람들과 만났다. 그사이 특허도 4개나 쌓았다. 지난해엔 국방부에서 우수 상용품으로 선정되었고, 군부대 시범 사업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아 올해부터 본격적인 제품 판매를 계획했던 터였다. 올해 초엔 관심을 보여온 대기업들에 제안서를 제출하고 본격적인 영업을 준비했다. 하지만 지난 2월 말 이후 모든 것이 중단됐다. 군이나 정부 기관, 기업체 담당자들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그는 “연락을 해도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보자’라는 답만 돌아왔다”고 했다.

이 대표는 최근 직원 한 사람을 내보내야 했다. 현재로썬 사실상 매출이 없는 만큼 어떻게든 고정비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어서다. 그를 포함해 4명이던 직원은 이제 3명이 됐다.

블랙박스용 보안 솔루션 만드는 유원솔루텍의 이동호 대표가 2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제과학진흥원 경기벤처창업센터 내 사무실에서 시제품 테스트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줄인 탓에 사무실에는 이 대표 혼자만 있었다. 김성룡 기자

블랙박스용 보안 솔루션 만드는 유원솔루텍의 이동호 대표가 2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제과학진흥원 경기벤처창업센터 내 사무실에서 시제품 테스트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줄인 탓에 사무실에는 이 대표 혼자만 있었다. 김성룡 기자

"정부·지자체가 먼저 기업 발주 나서달라"  

그가 생각하는 코로나19 위기 극복 방안은 "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경제 활동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기업 활동이 멈춰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대표는 “질병관리본부 등에서 기업인의 대면 활동 시 감염예방을 위한 지침을 마련해주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들도 기업활동과 관련한 예산을 적극적으로 집행해줘야 한다”며 “우리 회사처럼 절벽에 서 있는 기업들도 정상적인 수주만 이뤄진다면 정부 지원금이 없어도 얼마든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단 사람을 만나야 뭘 팔든지 할 것 아니냐”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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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소상공인 긴급자금 대출 접수 아이디어도 내놨다. "인터넷으로 접수해서 1차로 서류를 검토한 후 이상이 없으면 순서대로 대면 시간을 정해주면 수많은 사람이 밤을 새우며 대기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제 막 본궤도에 오르나 싶던 사업은 주춤한 상황이지만,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회사를 살려낸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긴급자금 융통과 관련한 서류 접수를 마친 그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두꺼운 마스크 뒤에 가려진 희망을 봅니다. 이번 위기도 이겨내야죠.” 이 대표는 자신에게 닥쳐온 인생의 세 번째 파도를 넘고 있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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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동호 대표가 중앙일보에 보내 온 e메일의 일부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단 판단에, 이 대표 동의를 구하고 글을 소개합니다.>

사업 초기 창업 지원센터 주차장에서 겪은 일 입니다.

이맘때 쯤이었습니다. 반찬 냄새가 날까봐 야외 주차장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바로 앞 풀숲에서 무당벌레 한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갸날픈 풀잎을 위태 위태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는데, 풀잎 끝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제 처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 잠시 멈추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았습니다. 어렵게 올라 온 풀잎 끝 그 앞은 낭떠러지 였습니다. 돌아갈 수도 없는 위기 상황.

그 순간 무당 벌레는 날개를 펴고 힘차게 날아 올랐습니다. 그리고 유유히 풀숲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을 보며 저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 나도 날개를 만들자. 튼튼하고 멋진 날개를 만들수만 있다면 백척간두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 창업 후 지금까지 묵묵히 그 날개를 만들어 왔습니다. 어렵고 힘들때 마다 멋지게 날던 그 무당벌레 한마리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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